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 전시장면. 그림은 멜로초 다 포를리 '천사들 무리'(1481) 인쇄본. 전시된 조각상 중에는 이 그림 속 아기천사 모습도 있다. 권근영 기자

“천사를 본 적이 없다. 내 눈앞에 천사를 데려다 놓으면 그려 주겠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1891~77)는 천사를 그려 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응수했다. 쿠르베의 이 말이 무색하게 서울 노원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지하 전시실에는 천사상이 한가득이다. 대리석처럼 새하얀 아기천사가 축복하듯 통통한 팔을 들어 올렸고, 커다란 날개 접은 파란 천사상은 좌대 밑에서부터 나오는 조명을 받아 한층 투명해 보인다.

신미경 개인전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

대리석이 아니라 비누다. 신미경의 '엔젤 시리즈 DL'(2024)는 '천사향'을 가미한 액상 비누를 거푸집에 부어 굳혔다. 권근영 기자

이곳 어린이갤러리에서 열리는 조각가 신미경(57) 개인전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이다. 신미경은 천사상을 비롯한 신작 100여점을 내놓았다. 신미경은 포를리·바사리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린 천사 이미지 그대로 조각으로 제작했다. 보이지 않지만 천사 이미지는 커피점 로고부터 미술관 아트상품까지 일상에 흔하디 흔하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어떤 소설은 첫 문장으로 기억된다. 강신재(1924~2001)가 1960년 『사상계』에 발표한 「젊은 느티나무」도 그렇다. ‘비누 냄새’는 주인공의 인상부터 관계까지 시각ㆍ촉각적 느낌을 환기한다.

교회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비누 천사상'들이 자연광 속에 한껏 투명해졌다.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천사 조각상들은 전시장 밖에까지 강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다. 향기, 바로 비누향 때문이다. 서울과 런던에서 활동하는 신미경은 지난해 ‘엔젤향’을 우연히 접하면서 천사라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보이기는커녕 그 존재 여부마저 불확실한 천사를 가지고 향기까지 만들어 내다니 상상력의 끝판왕이 아닌가 했죠.” ‘엔젤’‘스노우 엔젤’‘엔젤스 윙(Angel's wing)’ 이렇게 시판 천사향 3종 세트를 모았고, 이 향을 담은 비누로 천사 조각상을 만들었다.

전시는 화장실에도, 의외의 곳에 놓인 것들  

어린이갤러리 화장실에서는 천사 조각상을 비누로 사용할 수 있다. 관객들의 손을 타며 마모된 조각들은 다시 작품으로 전시될 예정이다. 권근영 기자

미술관 입구부터 솔솔 풍기는 비누향의 하이라이트는 화장실. 어린이갤러리가 있는 지하 화장실 세면대에는 천사 조각상들이 놓여 만져보고 씻어볼 수 있다. 적당히 관람객들의 손을 탄 뒤 다시 작품으로 전시될 예정이다.

런던 유학 중 대영박물관에서 본 매끈한 옛 대리석 조각이 비누처럼 보인 게 시작이었다. 비누를 깎아 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첫 비누 조각이 ‘번역-그리스 조각상’(1998)이었다. 그리스 로마 조각상부터 화려한 무늬의 17세기 중국 도자기까지, 불상부터 영국의 기마상까지 그의 손을 거쳐 비누 조각으로 재탄생했다.

30년 가까이 비누를 재료로 '문화적 번역'을 말하는 조각가 신미경. 옆의 천사상은 좌대에서 나오는 빛으로 더욱 투명해졌다. 뉴시스

그리스가 아닌 영국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들이나, 한국의 미대 입시생 울리던 석고상처럼 신미경은 의외의 장소에 놓인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유학생인 자기 자신처럼. 이런 ‘문화적 번역’의 재료로는 때도 의미도 깔끔하게 지워버리는 비누가 제격이었다. 생활 속에서 하찮게 만나고, 싹 씻어버리면서 제 몸도 녹여 없애버리는 비누 말이다.

지난해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의 한국 미술’을 열었다. 북미 최대 규모 한국 현대미술전이었다. 신미경은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라는 제목으로 미술관 야외 광장에 대형 비누 조각들을 세웠다. 이 미술관 건물 외부에 놓인 신상들 중 ‘동양의 신’들만 골라 만들었다. 서구인들이 상상한 동양의 신을 한국 미술가가 다시 조각한 ‘번역의 번역’이었다. 이 ‘신’들은 미술관 밖에 설치돼 전시 기간 내내 서서히 마모됐다.

어린이갤러리 무시 말라, 상상력 발전소  

이번엔 서구의 신, 천사다. 오랜 세월 미술가들이 상상해 그려온 천사 이미지들을 그대로 비누 조각으로 만들었다. 추상화를 닮은 ‘비누 회화’들도 나왔다. 2톤 가까이 녹인 비누를 큰 틀에 부어 굳힌 ‘라지 페인팅(Large Painting)’ 시리즈다. “화장실의 비누 조각도, 벽에 걸린 비누 회화도 제가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없고, 같은 걸 재연할 수도 없죠”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비누로 된 그림이다. '라지 페인팅'(2024) 시리즈는 액상 비누를 금속틀에 부어 만든 대형 추상화다.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하찮은 비누에서 철학적 매력을 끌어낸 신미경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13), 하인두예술상(2023), 서울예술상(2024) 등을 수상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김성은 운영부장은 “서도호ㆍ강서경ㆍ홍승혜 등 한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미술가들이 그동안 이곳 어린이갤러리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줬다. ‘비누로 만든 천사’에서 어른들도 영감을 얻어 가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년 5월 5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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