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네가 떠나기 전에 말했다면 좋았을 걸’

음악과 그림 이야기를 나누던 시절의 조영남과 김민기. [사진 조영남]

원래 김민기는 웃기는 친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서울대 미대를 다니다가 가수가 된 것도 웃기는 일이고, 종내에는 뮤지컬 연출자가 된 것도 그렇습니다. 그가 천재였다는 사실은 얼마 전 알게 됐습니다.

지난 초봄 김명정 방송작가한테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아저씨, 극단 학전이 문 닫는데요. 김민기 대표의 건강 상태도 안 좋고 그래서 이번에 김민기 다큐멘터리를 찍으려고 해요. 아저씨도 인터뷰 응해주세요.” 이후로 김 작가 일행이 직접 우리 집에 와서 김민기에 관한 전반적인 얘기를 적어갔습니다. 한두 달 후에 또 김 작가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김민기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가 SBS에서 3부작으로 편성됐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방송을 보곤 많이 놀랐습니다. 학전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긴 했으나, 출신 배우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겁니다. 황정민, 설경구를 비롯해 무려 100명도 넘는 것 같습니다. 배우들과 계약서를 써가면서(당시엔 배우와 계약서를 쓰는 일이 없었다) 끝까지 극단을 밀고 나갔던 건, 그가 한없이 맑은 결의 남자이고 바다같이 너그러운 마음씨의 소유자였기 때문임을 다시금 깨닫게 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김민기가 천재 끼가 있다’는 걸 대략 인지하고 있었지만, ‘저자는 천재다’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다큐에 나온 그의 모습은 천재라는 확신을 갖게 하더군요.

방송에서 김민기는 “요즘 ‘아침이슬’이 국민가요가 됐는데 소감이 어떠세요?”라는 사회자 주병진의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특유의 멋쩍은 얼굴 표정과 저음의 느릿한 목소리로. “겨울 내복 같은 거죠.” 자신의 노래를 칭찬받는 일이 얼마나 쑥스러운 일인지 알기에, 그 대답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나였다면 우물쭈물하고 멈칫했을 것입니다. 나 잘났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의 질문을 종종 받아봐서 그 기분을 잘 압니다. 그런데 김민기는 지나친 겸양 없이 간결하게 대답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위대한 노래 ‘아침이슬’이 ‘겨울 내복’ 같은 거라니 얼마나 절묘한 대답인가요. 내복이 좋다고 하기에도 그렇고, 필요하다고 해도 자랑하기엔 애매한 물건인데 그것이 바로 ‘아침이슬’이라니요.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김민기 찬양을 하면서도 누구 하나 김민기를 천재로 단정 지은 인물은 없습니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그는 일찍부터 천재였습니다. 우리말을 천재적으로 바꿔 쓰곤 했는데, 그가 결성한 서울대 미대 듀엣팀 ‘도비두’는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이고 그가 즐겨 쓰던 ‘노 트러블럼(No Troublem, 걱정 말라는 의미)’은 트러블(Trouble)과 프로블럼(Problem)을 섞어 만든 것으로, 국어대백과사전에 올려도 손색없는 어휘입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1973년 내가 미국에 건너가기 전 미술 전시를 했을 때 그가 쓴 추천의 글을 지금 읽어보면 그가 천재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가수가 미술을 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기에, 그 어떤 전문가도 내게 추천의 글을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걸 알았던 김민기가 “할 수 없지, 그럼 내가 써야지”하며 써줬던 글입니다. ‘쇼펜하우어는 25세에 대학교수로 취임하고 니체도 24세에 대학교수로 취임하지만, 김민기가 조영남 미술 전시회에 추천의 글을 쓴 건 서울미대 회화과 2학년의 약관 22세 때였다.’

나는 마침 요즘 출판계에서 대세를 이루는 쇼펜하우어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도 ‘김민기는 천재’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칠십 평생을 살면서 두 명의 천재를 만났습니다. 한 명은 책을 통해 알게 된 ‘날개’의 시인 이상이고, 또 한 명은 내 눈으로 직접 본 김밍기(제가 평소 부르던 별명입니다)입니다. 죽기 전에 내가 김민기한테 ‘야, 김밍기! 너는 천재야’라고 말해줬다면 좋았을 것을요.

청담동에서 조영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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