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10음절짜리 행 14개(4-4-4-2 구조)가 규칙적 라임(각운)과 함께 움직이는 정형시다. 총 154편 중 빼어난 것을 고르고, 동시대적 사운드를 입혀 새로 번역하면서,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이해와 위로 건네는 소네트 29 #왠지 좋은 시 vs 따분, 반응 갈려 #존재 고양하는 사랑시로 읽으면 #뛰어나진 않아도 좋아지는 시 #

내가 운명에 모욕받고 사람들 눈 밖에 나서
버려진 내 처지를 홀로 울어야 할 때가 있지  
덧없는 눈물로 응답 없는 하늘을 괴롭히면서  
나를 생각하다 운명 저주할 때가 있지, 그때,  
나는 꿈꾸지, 희망이 많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누구처럼 멋진 외모에 벗도 많으면 좋겠다고  
이 사람의 능력, 저 사람의 기회 욕망하면서  
내가 실컷 누리는 것엔 만족할 줄도 모르면서.  
이런 생각들로 나를 거의 경멸할 뻔하다가도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그때 내 마음이란 건
동틀 무렵 적막한 지상에서 비상한 종달새가
천상의 문 앞에서 찬가를 부르는 그런 마음.
당신 달콤한 사랑 생각하면 나는 부자가 돼  
내 처지를 왕과 바꿀 생각마저 멸시하게 돼. 
소네트 29 (신형철 옮김)

누군가에겐 가장 애틋한 시가 다른 누군가에겐 가장 답답한 시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양극단의 반응만 존재할 뿐 중간은 없는 그런 시. 셰익스피어의 이 소네트가 그런 사례 중 하나다. 19세기 초 영국 낭만주의의 상징적 인물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셰익스피어 소네트 154편 중 가장 아꼈던 이 작품을, (이 지면에 자주 등장하는) 현대 영국 시인 돈 패터슨은 ‘미련퉁이(duffer)’ 같은 시라고 깎아내린다. 뭐 하나 번듯한 게 없다는 뜻이다. 메시지는 투명하고(즉 따분하고), 비유는 진부하다는 것(특히 종달새 운운하는 대목). 패터슨의 말은 다 옳은데 그렇다고 콜리지의 체면이 구겨지는 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나를 이해해줄 것 같은 시  

콜리지 역시 이 시가 시학적으로 뛰어나다고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이 시가 훌륭하다’와 ‘나는 이 시가 좋다’는 다른 말이다. 전자는 대상에 대한 평가, 후자는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이 둘이 엇갈릴 때가 있다. 좋지 않아도 좋아지는 시가 있는 것이다. 그 시가 먼저 나를 좋아한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된다. 이 시가 나를 이해하는 것 같고, 그럼으로써 위로하는 것 같을 때 말이다. 그러니 돈 패터슨처럼 선배 시인의 취향이 변변찮다고 타박할 것까진 없다. 그냥 콜리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다. 소네트 29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또 위로받는 사람. 그렇다면 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건 우리가 자기를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하단 뜻도 된다.

김지윤 기자

첫 네 줄은 지금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데 그 핵심은 ‘불명예(disgrace)’다. 사전적 의미를 음미하자면 이것은 ‘누군가의 수치의 원인이 되어버린 상태’다. 그래서 첫 행(“in disgrace with fortune and men’s eyes”)은 운(運)과 타인이 나를 수치스러워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시에 운명을 저주한다는 표현이 있기는 해도, 욥기의 욥처럼 일방적으로 당한 억울하기만 한 상황은 아니고, 자신의 책임도 분명히 있어 보인다. 그러니 더 비참할 것이고, 그래서 화자는 주눅 들어 있다. 자신이 울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그게 하늘을 대상으로 한 정당한 항변이 아니라 하늘을 ‘괴롭히는(trouble)’ 일이라고 말하게 만든 마음은 그런 것이리라.

다음 네 줄은 그래서 바라는 게 많을 수밖에 없는 제 마음을 들여다본다. 지금의 나 말고 어떤 다른 나가 되고 싶은가. 곧장 나오는 건 “희망이 더 많은(more rich in hope)” 사람이다. (한자어를 써서 ‘유망(有望)한 사람’이라고 하면 깔끔해질 대목이지만, ‘희망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대로 옮겨야 그 사람이 더 부러워진다) 바라는 게 많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라는 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이상한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소망’이나 ‘욕망’과는 달라서 ‘희망’이라는 말엔 ‘가능성’이 이미 함유돼 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좋은 조건 속에 있다는 뜻이다. 감히 희망을 가지고 싶다는 희망, 화자는 그게 없는 제 결핍을 생각한다.

그런데 반전이 온다. 모두가 나를 버린 게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당신은 ‘내 곁에’ 있고, 당신이 내 곁에 ‘있다’. 이런 발견을 ‘소중한 것은 잊기 쉽다’ 류의 깨달음으로 처리하면 이 시는 가망 없이 진부해진다. 대신 이 시에서 사랑의 의미를 ‘소유냐 존재냐’의 방식으로 물어봐야 한다. 당신은 내가 소유한 (다른 모든 결핍을 압도할 만큼) 귀한 재산인가, 아니면 내가 존재하는 지평을 (내가 내 결핍과 맺는 관계를) 바꾸는 사람인가. 이 시엔 두 해석 가능성이 섞여 있다. 사랑은 나의 결핍을 채워 “부자”로 만들 수도 있고, 결핍이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는 다른 지평으로 “비상”하게 할 수도 있다. 후자를 말한다는 전제하에, 나도 이 시가 좋다."

"사랑은 결핍으로 끝장" 정반대 독법도  

아직 한 단락이 남았으니, 다른 쪽 편도 들어주기로 하자. 사랑이 결핍을 치유한다고? 사랑은 오히려 결핍으로 끝장나는 게 아니던가? 이렇게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이 시를 끝에서부터 다시 써서 맨 처음 “홀로(all alone)”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내 처지를 왕과도 바꿀 수 없게 했지. 당신의 사랑은 나를 그만큼 부자가 되게 했거든. 그건 마치 지상에서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일 같았지. 그런데 이제 그대를 떠올리면 나는 나를 경멸하게 돼. 왜 내겐 당신만 있을까. 이 사람의 능력, 저 사람의 기회는 없고 왜 당신만을 누려야 할까. 나는 덧없는 눈물로 내 운명을 저주하네. 지금 나는 홀로 울지. 당신이 곁에 있어도 당신은 내게 무력해.”

When in disgrace with fortune and men’s eyes
I all alone beweep my outcast state,
And trouble deaf heaven with my bootless cries,
And look upon myself, and curse my fate,
Wishing me like to one more rich in hope,
Featured like him, like him with friends possessed,
Desiring this man’s art, and that man’s scope,
With what I most enjoy contented least;
Yet in these thoughts my self almost despising,
Haply I think on thee, and then my state,
Like to the lark at break of day arising
From sullen earth, sings hymns at heaven’s gate;
For thy sweet love remembered such wealth brings
That then I scorn to change my state with kings.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쓰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역사』 『몰락의 에티카』 등을 썼다. 2022년 가을부터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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