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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역사
설혜심 지음
휴머니스트

예의가 처음부터 당연히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의란 합당한 행동의 세세한 규칙, 즉 매너로 표현되는 것인데,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고대인과 현대인, 궁정인과 변방 농민이 공유할 수 있는 매너가 무엇일지는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자연적으로 보이지만 분명 역사의 산물인 매너를 사회 변동과 함께 추적한 책이 유대계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1939)이다. 역사사회학의 고전인 이 책은 12세기 궁정에서 형성된 매너가 19세기까지 서구 사회 전체로 전파된 과정을 서술한다. 상업 발전으로 부유해진 프랑스 궁정은 놀고 있는 무장 집단인 기사를 끌어모았고 이들이 스스로 무교양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길들였다. 기사들의 궁정화는 중세 지방 분권 체제의 종말을 뜻했고, 절대주의 국가가 시작된다. 이후 유럽 매너의 역사는 프랑스 궁정 예법이 퍼져나가는 과정이었다.

미뉴에트를 추는 젊은 남성의 모습. 예법서 '품격 있는 아카데미'에 수록된 그림이다.[사진 휴머니스트]

『문명화 과정』은 비판도 받았다. 중세 이전 시대가 무시된 것, 문명화를 사실상 ‘프랑스 궁정화’로 파악한 것 등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설혜심 연세대 교수의 『매너의 역사』는 엘리아스의 이러한 공백과 약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영국사 전공자로서 『소비의 역사』(2017), 『인삼의 세계사』(2020),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2021) 등 얼핏 국내 역사학자가 쓴 것 같지 않은 신선한 주제의 저서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주목을 받아 왔다. 최신작 『매너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서양 매너의 역사를 개관한다. 저자가 사용한 사료는 유럽 각 시대에 생산된 100여 권의 예법서들이다.

책 읽는 여성들을 그린 알렉산러 로시의 회화 '금서'(1897). 19세기 들어 노동자들의 문해율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에티켓북의 수요도 크게 늘었다. [사진 휴머니스트]

1장에 등장하는 테오프라스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본래 '이럴 때는 이렇게 하라'는 규범집은 아니었다. 전자의 『성격의 유형론』은 문학적 즐거움을 위해 쓴 책 같아 보이며, 후자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다. 키케로에 와서 예법서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 된다. 주목할 것은 키케로가 ‘천대해야 할 업종’들을 명시한 것이다. 매너는 지침이 된 순간부터 계급을 구분하는 장치로서의 정체를 드러냈다.

매너는 원래 불공평한 세계에 던져진 또 하나의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매너는 지배 계층의 것이었으며 그들은 늘 복잡한 규칙을 추가하여 후발 주자의 기를 꺾으려 했다. 그러나 매너를 계층 사이에 쌓은 장벽으로만 볼 수는 없다. 모순적이지만 상류층으로 진입하게 해주는 입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727년 “아직도 조상을 잘 둔 것이 젠틀맨의 기본 요건이다”라고 대니얼 디포가 불평한 것은, 신분상승의 열쇠로서 매너의 역할에 사람들이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영국 버킹검궁 드로잉룸에서 빅토리아 여왕(1819년 ~ 1901년)을 알현하는 숙녀들과 사교계에 처음 발을 내딛는 데뷔탕의 모습. [사진 휴머니스트]

영국식 매너의 독자성은 이 책의 핵심 부분이다. 영국인들은 프랑스식 세련과 구별되는 자기들의 특질을 강렬히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인의 악명 높은 거친 천성과 우악스러운 성격이 정치적 자유를 지켰다."(키스 토머스)  예절은 지키겠지만 가식적으로 알랑거리는 태도는 기대하지 말라. 다시 말해 영국식 매너는 어떤 개성을 획득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독특한 민족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려면 유독 영국에 관대했던 역사의 우연을 감안해야 한다. 영국인의 자신감은 상업적 성공과 구체제가 신흥세력을 체제 안으로 성공적으로 통합한 혁명에 힘입은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번영과 정치적 자유의 세례를 받은 영국식 매너는 미래의 보편적인 매너의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20세기 들어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새로운 에티켓이 생겨났다. 날씨 궂은 영국에서 지붕 없는 차로 비포장도로를 달리려면 코트, 장갑, 모자, 얼굴을 덮는 스카프나 고글을 준비해야 했다. [사진 휴머니스트]

저자의 결론은 명확하다. 매너는 필요하다. 계급이 사라지고, 계급을 구분하려는 무의미한 노력이 다 사라져도 말이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는데 이는 타인과 서로 존중하는 관계를 수립하지 않고는, 기분 좋은 사회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행복을 위한 매너. 이 슬로건을 통해 우리는 첫 장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로 되돌아간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책은 전문적 역사서이면서도 읽기 수월하며 100여 개의 컬러 도판을 수록하여 아름답고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독자들이 소장 욕구를 느낄 듯하다. 상세한 주와 참고문헌, 찾아보기도 충실하다. 다만 성이 아닌 이름순으로 배열된 찾아보기는 나로서는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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