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발레 콩쿠르인 YAGP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박건희 무용수. 지난 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가 취한 포즈는 이번 콩쿠르 작품의 마지막 포즈다. 장진영 기자

지난달 전남 광양시 곳곳엔 "박건희 무용수, YAGP 그랑프리 수상 축하" 플래카드가 걸렸다. 광양에서 나고 자란 박건희(19)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이 세계적 콩쿠르인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YAGP)에서 최고의 상인 그랑프리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다. 광양에 사는 그의 아버지 박정교 전 발레리노가 걸었다고 한다. 박건희 무용수는 지난 2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아빠가 좋아하시는 건 좋았다"며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좋을 수밖에 없다. 이 상은 발레 무용수를 꿈꾸는 10대라면 꿈에서라도 타고 싶을 상이다. YAGP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프리 드 로잔(Prix de Lausanne) 등과 함께 대표적 발레 콩쿠르로 꼽힌다. 25년째 매년 개최된 이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한국인은 그가 네 번째. 박건희 학생의 그랑프리 선배는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서희 수석무용수(2003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김기민 무용수(2012년), 영국 로열발레단의 전준혁 솔리스트(2016년)의 세 명으로, 모두 기라성 같은 예술가다.

박건희 학생이 수상한 트로피와 상장. 장진영 기자.

올해는 25주년을 맞아 규모가 더 컸다. 1만2000명이 넘는 참가자 중에서 예선을 거쳐 41개국에서 2000명이 우선 선발됐다. 이들은 지난달 11~20일에 걸쳐 미국 뉴욕 링컨센터 데이비드 코크 홀에서 결선을 치렀다. 박건희 학생 외에도 한예종 이승민(19)ㆍ손민지(18) 학생이 2인무인 파드되(pas de deux) 부문에서 1등을 받았다. 손민지 학생은 여성 솔로 부문에서도 3등을 했고, 이강원(18) 학생은 남성 솔로 톱12에 올랐다. 한국 발레의 앞날은 밝다. 다음은 박건희 학생과의 일문일답 요지.

축하한다. 소감은.  
"마지막까지 호명이 안 돼서 설마 했는데, 너무 놀랐다. 연습한 거에 비해 너무 큰 상이다. 경연 무대에선 즐겁고 행복했다. 최선을 다해 오른 무대를 관객이 응원해주는 느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각국에서 2000명의 발레 꿈나무가 모였는데.  
"다른 출전자들에게 많이 배웠다. 남미 쪽 친구들은 무대를 장악하는 쇼맨십과 테크닉이 화려했고, 유럽은 귀족처럼 절제된 품격미를 갖췄더라. 나도 계속 발전하고 싶다."  
2022년 프리 드 로잔에도 출전했는데.  
"입상은 못 했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출전만으로도 좋았다. 서울로 돌아와선 '더 열심히 하자'는 마음을 먹었다."  

이번엔 테크닉과 파워를 모두 요하기로 악명 높은 '그랑 파 클래식(Grand Pas Classique)'을 택했다. 그는 "로잔에서 어떤 출전자가 '그랑파 클래식'을 너무 즐겁게 추는 걸 봤다"며 "음악에 몸을 맡기며 즐기는 모습에 반해서 자청했다"고 말했다.

박건희 무용수가 사뿐히 날아오르고 있다. 몸이 풀리지 않았을텐데 괜찮겠냐는 취재진에 "전혀 문제 없다"며 훌쩍 뛰어올랐다. 장진영 기자

연습 과정은.  
"처음 연습 영상은 눈뜨고 못 볼 정도다(웃음). 정제되지 않고 막 던져버리는 춤이었다. 그냥 계속 연습했다. 큰 콩쿠르 무대도 나가면서 조금씩, 확실히 성장하는 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은.  
"중1 때까지는 발레 진짜 싫어했다(웃음). 남자아이들 특유의 싫다는 감정도 있었고, 발레 무용수였던 부모님(박정교, 조나경 전 광주시립발레단)이 시키셔서 사춘기엔 반항심도 있었다. 사이클 선수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린 적도 있고, 속 많이 썩였다(웃음). 그러다 부모님이 '선화예중 편입시험 붙으면 계속하고, 아니면 그만두자'고 제안하셨는데 덜컥 붙었다."  
서울 유학 생활은.
"힘들긴 했지만 남자 동급생들과 시너지를 내면서 즐거워지더라. 내 춤이 많이 뒤처져 있었다. 알아야 보이는 게 있는데, 그걸 볼 수가 없었다."  

박건희 학생의 멋진 아라베스크. 운동화를 신은 발인데도 완벽한 턴아웃(발레의 기본인, 외회전)을 자랑한다. 그는 "유연성은 있는데 근력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어떻게 연습했나.  
"그냥, 선생님들께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즈음 수준 차이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따라올 수 있도록 선생님들이 기다려주셨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게 감사하다."  

박건희 학생이 착용했던 콩쿠르 번호표. 그의 보물이 됐다. 장진영 기자.

계획은.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다. 이번에 ABT 스튜디오 컴퍼니 등에서 제안을 해줘서 감사하긴 하지만, 일단 한국에서 좀 더 배우는 게 맞을 것 같다. 나중엔 해외 무대에서, 가능하다면 주역으로 추고 싶다. ABT 입단이 꿈이었다. 10년 후엔 (이번 콩쿠르가 열렸던) 링컨센터 무대에 서고 있다면 좋겠다. 롤모델인 레오니드 사라바노프, 다닐 심킨, 김기민 무용수처럼 활약하고 싶다." 

관련기사

  • "높게 뛰려고만 했다"…세계 홀린 韓발레리나 서희 다른 길

    "높게 뛰려고만 했다"…세계 홀린 韓발레리나 서희 다른 길

  • "얘가 발레? 돈 버린다" 이런 말에도 러시아 거머쥔 韓발레리노

    "얘가 발레? 돈 버린다" 이런 말에도 러시아 거머쥔 韓발레리노

  • "발레 진짜 리허설은 부엌이다" 국립발레단 맏형의 말, 무슨 뜻?

    "발레 진짜 리허설은 부엌이다" 국립발레단 맏형의 말, 무슨 뜻?

  • 스위스 달군 'K발레'① '에스메랄다' 김시현…"오늘의 영광을 키운 건 팔할이 쓴 경험"

    스위스 달군 'K발레'① '에스메랄다' 김시현…"오늘의 영광을 키운 건 팔할이 쓴 경험"

  • "10초면 발레 의상 갈아입힌다"…무대 뒤 숨가쁜 이들의 보람 [유니버설발레단 40년 下]

    "10초면 발레 의상 갈아입힌다"…무대 뒤 숨가쁜 이들의 보람 [유니버설발레단 40년 下]

  • "한국·이탈리아 똑닮았죠"…수교 140년, 왜 발레를 무대 올리나 [시크릿 대사관 시즌3]

    "한국·이탈리아 똑닮았죠"…수교 140년, 왜 발레를 무대 올리나 [시크릿 대사관 시즌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