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 [사진=AP=연합뉴스]

[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가 15일(이하 현지시간)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총격을 당하자 국제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현재 피초 총리는 의식을 회복했으나 여전히 위중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사건을 총리를 노린 암살 기도로 규정했다. 현직 총리를 노린 암살 시도의 이유가 정치적 동기라고 확인되면서 정치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지지자들과 인사 중 5발 총격.. 5시간 응급수술 "의식 회복, 여전히 위중"

용의자 71세 작가.. 지난해부터 반정부 시위 참가 확인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이날 수도 브라티슬라바 외곽 마을 핸들로바 지역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됐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에는 경호요원이 총을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는 장면이 담겼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현지 언론에서는 용의자가 5발 정도를 발사했고, 피초 총리가 이 중 3발 이상을 복부 등에 맞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5시간 가까이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피초 총리를 수술한 반스카 비스트리차의 대학병원 관계자는 16일 취재진을 만나 피초 총리의 상태가 안정됐지만 부상이 심각한 만큼 중환자실에서 관리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피초 총리의 정치적 우군이자 지난 4월 대선에서 승리한 피터 펠레그리니 당선인도 병문안한 뒤 기자들에게 "의료진은 제가 아주 잠깐 피초 총리의 병상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해 줬다"며 "상황은 여전히 심각하다"고 말했다.

슬로바키아 경찰은 용의자를 현장에서 체포한 뒤 수사를 벌이고 있다. 용의자는 슬로바키아 국적의 71세 작가이며,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전해졌다. 슬로바키아 방송사들은 그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영상녹화분을 입수해 보도하기도 했다.

슬로바키아 총리실은 이번 총격을 암살 시도로 규정했다.

마투스 수타이 에스토크 슬로바키아 내무장관은 취재진을 만나 "이 암살 시도는 정치적 동기가 있고 용의자는 지난달 선거 직후 범행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에스토크 장관이 언급한 선거는 피초 총리 진영의 승리로 돌아간 4월 대통령 선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 "범인은 급진적 정치단체의 일원이 아니며 좌파나 우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 외톨이 같은 사람은 작년부터 이어진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 친러 vs 반러 갈리며 정치 양극화

특별검찰청 폐지, 공영언론 장악 등 반발 반정부 시위도 지속

이번 암살 시도는 슬로바키아 내 정치 양극화가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슬로바키아 전역에선 피초 총리의 친러시아 정책과 고위 공직자 부패 사건을 다루는 특별검찰청 폐지, 공영 언론 장악 등에 반대하는 수천명 규모의 집회·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피초 총리는 1993년 독립 이후 수십 년간 슬로바키아 정치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지난 2006∼2010년 첫 번째 임기에 이어 2012∼2018년 연속 집권하는 등 모두 세 차례 총리를 지냈다.

특히, 슬로바키아는 미국과 유럽의 집단 방위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임에도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러시아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 국제사회의 우려를 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0월 치러진 총선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하는 친러 지지에 힘입어 총리직에 복귀했고, 친러 성향인 페테르 펠레그리니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슬로바키아 내부에서 친러 정치 세력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외신도 슬로바키아 정치의 극단적 분열이 참극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피초 총리는 성소수자(LGBTQ+) 권리, 성 문제, 이민자에 대한 분열을 (정치에) 이용했다"며, 이런 전략으로 인해 슬로바키아가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된 상태라고 분석했다.

BBC는 이번 사건으로 슬로바키아 내 분열의 정치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피초 총리와 연정을 구성한 국민당의 안드레이 단코 대표는 야당을 향해 "정치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선포 하는 등 피초 총리 측근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야당과 언론을 정면 비판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여야의 극단적 대립과 양극화한 여론 지형 속에서 빚어졌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정치권에선 반목을 멈추자는 자정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날 여권의 펠레그리니 대통령 당선인과 야권 인사인 주자나 차푸토바 현 대통령은 공동성명을 내고 "우리는 추가적인 정치 대립을 피해야 한다"며 "우리는 서로에게 이해의 신호를 보내고자 한다. 이제 증오의 악순환을 끝내자"고 촉구했다.

한편, 슬로바키아는 1989년 동유럽에 확산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공산정권이 붕괴한 후 내내 정치 분열을 겪어왔다.

슬로바키아 전 외무부 고문 니치는 슬로바키아에서는 정치인에 대한 살해 위협이 빈번하다면서 "총리 총격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슬로바키아는 유럽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국가 중 하나로, 정치인들의 생명이 자주 위협받는다"고 전했다.

다만, 갈등이 격화한 것은 6년 전인 2018년 피초 총리가 속한 사회민주당과 범죄조직과의 유착 의혹을 취재하던 잔 쿠치악 기자가 약혼녀와 함께 피살되면서부터라는 분석이 나온다.

피격 후 병원으로 이송되는 피초 총리 [사진=로이터=연합뉴스]

국제사회, 암살 시도 규탄.. 정부 "조속한 쾌유 기원"

이번 암살 시도로 슬로바키아를 포함한 국제 사회가 받은 충격은 상당하다. 지난 2003년 조란 진지치 세르비아 총리가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마피아 조직에 의해 살해된 이래 20여년 만의 암살 시도 사건이다.

이에 우리 정부와 국제 사회는 피초 총리를 겨냥한 암살 시도를 일제히 규탄했다.

16일 외교부에 따르면 정부는 한덕수 국무총리 명의로 피초 총리 앞 위로 서한을 보냈다.

외교부 당국자는 "외교부를 포함해 우리 정부 차원에서 위로의 뜻을 표명한 것"이라면서 "피초 총리와 가족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하고 피초 총리의 조속한 쾌유를 기원한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이 끔찍한 폭력행위를 규탄한다"고 밝혔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카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이번 총격 사건에 대해 "괴물 같은 범죄"라고 비난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엑스(X·옛 트위터)에서 "폭력이나 공격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비겁한 암살 기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폭력이 유럽 정치권에서 용납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슬로바키아 총리에 대한 공격을 강력히 비난한다"며 "이런 폭력 행위는 우리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으며 우리의 가장 소중한 공동 선(善)인 민주주의를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이웃 파트너 국가 수장에 대한 공격을 규탄한다"며 "그가 빨리 회복돼 슬로바키아 국민에 대한 우리의 연대를 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등 각국 정상도 SNS를 통해 잇달아 피초 총리와 연대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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