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전 헬기에 앉아 있는 이란 대통령 [사진=AFP=연합뉴스]

[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19일(이하 현지시간) 오후 헬기 추락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중동 정세에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라이시 대통령이 이란의 차기 최고지도자 1순위 후보로 거론돼온 만큼 내부의 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나아가 헬기 추락의 원인이 단순 사고가 아닌 피격이나 암살 시도로 드러날 경우 중동 화약고가 폭발할 수도 있다. 이에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향후 전개될 상황을 조심스레 예측하는 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댐 준공식 참석 후 복귀 중 추락 사고.. 이란 "악천 후로 사고"

로이터 "라이시 이란 대통령 등 전원 사망 추정.. 헬기 전소"

주요 외신과 이란 내무부에 따르면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을 태운 헬기가 19일 오후 북서부 동아제르바이잔주(州) 중부 바르즈건 인근의 디즈마르 산악 지대에 추락했다.

이 헬기에는 라이시 대통령과 함께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 말리크 라흐마티 동아제르바이잔 주지사, 타브리즈 지역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모하마드 알하셰미, 경호원 등이 탑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오전 동아제르바이잔 주에서 열린 기즈 갈라시 댐 준공식에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함께 참석한 뒤 타브리즈로 돌아오던 중 사고가 난 것으로 확인된다.

현지 언론은 초기에 이번 상황을 '헬기 비상착륙'으로 보도했으나 내무부 확인 후 '추락'으로 전환했다. 이란 국영 TV는 악천후가 사고 원인이라고 전했다.

수색 중 날이 저문 데다 비와 짙은 안개 탓에 구조 헬기는 물론 드론을 띄우기도 어려워 사고 헬기 추락 지점을 파악 및 탑승자 생사 확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20일 헬기의 잔해로 추정되는 열원이 발견됐으나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튀르키예 아나돌루 통신은 20일 현지에서 수색 중인 자국 아킨치 무인항공기(UAV)가 라이시 대통령이 탑승한 헬기의 잔해로 추정되는 열원을 파악해 이란 당국과 좌표를 공유했다고 엑스(X·옛 트위터)에서 전했다.

열원이 탐지된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국경에서 30㎞가량 떨어진 이란 타빌 마을 인근이며, 이란 당국은 정확한 사고 지점을 찾기 위해 특별 추적장치를 보유한 구조팀을 현장에 급파했다.

하지만, 로이터통신은 이란의 한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라이시 대통령이 탑승한 헬기가 추락으로 완전히 불에 탔으며, 라이시 대통령을 포함한 전원이 숨진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이란 국영TV도 추락 현장에서 아무런 생명의 신호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앞서 피르 호세인 콜리반드 이란 적신월사 대표도 "헬기가 발견됐다. 현재 헬기를 향해 이동 중"이라며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고 AFP통신과 타스통신이 보도했다.

유력한 차기 최고지도자.. 사망 시 이란 내부 혼란 불가피

헬기 추락으로 실종된 라이시 대통령은 서방과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강경보수 지도자이다. 지난 4월 13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 본토에 보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라이시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동 내 영향력을 확대하고 이스라엘과 긴장 고조 등 강경 보수 정책을 강화했다.

중동 전역의 이란 핵 프로그램을 가속화하고 이란이 배후로 있는 무장 세력을 지원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간 가자전쟁 국면에서 이른바 '저항의 축'으로 불리는 하마스,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시리아와 이라크 내 친이란 민병대 등을 지원하면서 이스라엘과 미국에 군사적으로 맞서왔다.

히잡을 착용하지 않는 여성을 단속하는 '도덕 경찰'을 다시 투입하는 등 여성 인권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2022년 20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도덕 경찰에 체포된 뒤 사망하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강경파 종교 성직자인 그는 2021년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선거에선 온건·친개혁 후보들이 대거 출마가 금지됐었고, 당시 투표율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정치권에선 하메네이 뒤를 잇는 유력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로 거론돼 왔다. 이란 지도부는 하메네이가 85세 고령에 병석에 있는 만큼, 수년 내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며 후계자 준비에 대비하고 있다. 때문에 이란 내부의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사고가 이란 내부에 불러올 영향이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히잡 시위 등 반정부 봉기 및 수백만명의 지난 3월 총선 투표 보이콧이 보여준 집권 세력에 대한 불만 고조, 사상 최저치로 추락한 통화 가치나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 등 미국의 제재로 인한 경제 악화 등을 불안 요소로 꼽았다.

분쟁 전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의 알리 바에즈 이란 국장은 NYT에 "라이시 대통령 사망 시 이란은 부통령이 정권을 넘겨받아 5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면서 "이 상황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통성 위기에 처해있고 역내에서 이스라엘 및 미국과 맞서고 있는 이란에 중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란의 정치 구조상 최고지도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만큼 별다른 혼란은 없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도 사고 직후 "이번 사고가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므로 이란 국민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美·EU 등 사후 파장에 촉각.. "상황 긴밀히 주시"

이코노미스트, 국내 암살 시도 및 이스라엘 관련성 여부 다뤄

이번 헬기 추락 사고에 미국과 유럽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중동정세가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추락사고가 단순 사고가 아닌 피격이나 암살 시도일 경우 중동 화약고가 폭발할 우려도 있다.

조지아주를 방문 중인 조 바이든 대통령은 사고를 보고받았고, 미 국무부는 성명을 통해 라이시 대통령이 탄 헬기 사고 보도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소셜미디어 엑스에 글을 올려 "이란 대통령과 외무장관을 태운 헬기가 예기치 않게 비상 착륙했다는 뉴스를 보고 있다"며 "EU 회원국 및 파트너들과 함께 상황을 긴밀히 주시 중"이라고 전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사고 원인을 악천후로 꼽으면서도 많은 이란 사람이 범죄와의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다고 짚었다.

'테헤란의 도살자'라고도 불린 라이시 대통령은 온건파부터 강경 보수파 동료들까지 자국 내에서도 적들이 많았으며 이 때문에 국내의 적들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그러면서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의 관련성 여부를 의심하는 시선도 있다고 언급했다.

오랜 앙숙인 이란과 이스라엘은 지난달에도 이스라엘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주재 이란 영사관을 폭격해 이란 혁명수비대(IRGC) 쿠드스군 사령관 모하마드 레자 자헤디 등을 암살하고 이에 대해 이란이 보복 공격을 가하면서 정면충돌한 바 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도 이란의 저명한 핵 과학자 등 오랜 적들을 암살해왔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다만 이코노미스트는 이스라엘이 아직 국가원수를 암살하는 수준까지는 간 적이 없었고,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대통령 암살을 도모하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일 수 있다며 이스라엘 개입 가능성은 적다고 봤다.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사고 관련 언급을 자제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 매체 와이넷(Ynet)는 헬기 추락 사고와 자국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와이넷은 이스라엘 당국이 공식 언급을 삼가고 있지만 한 소식통이 사고 연관성을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등 인근 국가들은 이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어떠한 도움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 외무부는 왕실이 "큰 우려"를 나타내며 관련 보도를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도 소셜미디어 엑스(X·구 트위터)를 통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표명했다. "우리는 이 고통의 시간에 이란 국민과 연대하며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안녕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아르메니아 외무부도 성명을 내고 이란 소식에 충격을 받았으며 이란 대통령 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르메니아 외무부는 "구조 작업이 계속되면서, 아르메니아는 이란과 가깝고 우호적인 이웃나라로서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지원 의향을 나타냈다.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도 엑스를 통해 관련 소식을 들었다면서 "모든 것이 잘 됐다는 좋은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시 대통령과 이란 국민 모두를 위한 기도와 위로를 전한다"고 했다.

하마스도 헬기 추락 사고에 큰 우려를 표명하며 이란과의 연대를 표명했다.

미국 CNN 방송 등에 따르면 하마스는 이날 사고 이후 낸 성명에서 "이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우리는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그 지도부, 정부 및 국민들과 완전한 연대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어 "전능한 알라께 이란 대통령 및 그와 동승한 대표단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하며 우리의 형제와 같은 이란 국민들이 어떤 피해도 입지 않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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