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적 지원에 더해 외교적 방패막이가 돼주던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즉각 휴전 요구 결의안에 반대하지 않고 기권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처음으로 안보리에서 즉각 휴전 요구 결의가 나오자 이스라엘 정부는 배신감을 표현하며 고위급 방미를 취소하는 등 미-이스라엘 관계가 외교적 실력 행사 단계로 접어들었다.

안보리는 25일 “지속적인 휴전으로 이어질 라마단 기간(이슬람 금식월로, 올해는 3월10~4월9일)의 즉각적 휴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14개 이사국 찬성으로 가결했다. 미국은 유일하게 기권했다. 결의에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에 “즉각적이고 조건 없는 인질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도 담겼다.

지난해 10월 가자지구 전쟁 개전 이래 안보리에서 즉각 휴전 요구 결의가 통과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지닌 미국은 앞서 3차례 이런 내용의 결의안 통과를 홀로 막았다. 지난 22일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남부 라파흐로의 진격 방침을 고수하는 것에 자극을 받은 미국이 ‘즉각 휴전’이라는 표현을 담은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그때는 역시 거부권을 지닌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했다. 즉각 휴전을 분명히 촉구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미국이 기권표를 던져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킨 것은 가자지구 전쟁뿐 아니라 다른 문제들을 놓고도 수십년간 이스라엘을 비호해온 전통과도 결별한 것이다. 그만큼 조 바이든 행정부의 불만이 크다는 점이 표출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인 3만2천명이 숨진 상황에서 이스라엘군이 피란민 등 140만명이 몰려 있는 가자지구 남단 라파흐로 진격하면 또다시 대형 인명 참사가 발생한다며 반대해왔다. 하지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바이든 대통령이 라파흐 진격을 레드라인(금지선)이라고 밝혔는데도 진격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 쪽은 공식적으로는 입장이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는 결의안에 대해 “우리는 일부 목적은 전적으로 지지한다”면서도 “결의안의 어떤 내용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소통보좌관도 “우리 정책에는 바뀐 게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안보리 안팎에서는 미국의 괄목할 만한 태도 변화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이 안보리 결의안 통과를 ‘방치’하자 이스라엘 쪽은 강하게 반발하며 고위급 대표단 방미를 취소시키는 맞대응에 나섰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기권표 행사는 “전쟁 시작 후 미국의 일관된 입장으로부터의 후퇴”라며 “인질 석방뿐 아니라 전쟁 수행에도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또 라파흐 작전에 관해 논의하려고 곧 보내려던 고위급 대표단의 방미를 취소시켰다고 밝혔다. 이들의 방미를 요청한 바이든 대통령에게 직접 반발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네타냐후 총리의 발표에 대해 커비 보좌관은 “라파흐로의 지상 진격을 놓고 실행 가능한 대안”을 논의하려던 계획이 취소돼 “매우 실망했다”고 밝혔다. 매슈 밀러 국무부 대변인도 “유감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고위급 대표단 방미 취소 전에 미국 방문길에 오른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이날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을 만났다.

미국이 표변한 배경으로는 대선을 앞두고 ‘학살 공범’으로 몰려 진보적 유권자들한테 외면 받는 바이든 대통령의 처지도 거론된다. 반면 하마스의 공격을 사전에 막지 못했다는 비난과 낮은 지지도에 시달리는 네타냐후 총리는 전쟁 지속을 통해 활로를 찾으려 한다는 평을 듣는다. 결국 두 지도자의 상이한 정치적 입지가 미-이스라엘 관계의 파열음으로 이어진 셈이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면책 조항: 이 글의 저작권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이 기사의 재게시 목적은 정보 전달에 있으며, 어떠한 투자 조언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만약 침해 행위가 있을 경우, 즉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정 또는 삭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