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로 6·25 전쟁 발발 74주년을 맞았다. 이 전쟁은 한반도가 전쟁터였지만 김일성의 야심에 강대국 미국과 중국, 소련이 말려든 사실상 국제전이었다. 참전국 중 중공군은 가장 대규모인 145만여 명이 파병돼 60만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다. 당시 중국의 입장과 중공군 참전 배경에 대해선 그동안 기밀 해제된 문서 등으로 많은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이슈를 살펴본다.

대만 대신에 한국이 당한 전쟁

당시 중국의 지상과제는 대만을 무력 통일하는 것이었다. 1950년 5월 1일 린뱌오(林彪) 휘하 중공군 40군과 43군은 당시 국민당 치하였던 하이난섬을 침공 5일 만에 점령했다. 곧바로 대만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한반도와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고 선언했다. 두 곳 중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가능성 높은 곳은 당연히 대만이었다. 애치슨 선언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유화 제스쳐로 해석됐다. ‘미국이 대만을 포기할 테니 소련과 친해지지 말고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의미였다.

6월 12일 마오쩌둥(毛澤東) 중국공산당(중공) 주석은 중공군에 보낸 전문에서 “대만을 신속히 점령하여 신중국 통일 과업을 끝내자”고 강조했다. 그런데 마오는 김일성이 6월 25일에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김일성은 마오에게 전쟁 개시일을 통보하지 않았고 마오는 전쟁 발발 사실을 외신을 통해 접했다. 북한의 기습 남침은 남한뿐만 아니라 마오에게도 기습이었던 셈이다.

당시 마오의 최대 관심사는 대만 점령이었다. 이는 김일성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대만이 중국에 점령된 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면 그때는 미국이 참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김일성은 평소 “마오쩌둥이 대만을 점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이유로 김일성은 전쟁 개시일을 마오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6·25가 터지자 중국의 대만 침공은 제동이 걸렸다. 6월 27일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중국 내전에 대한 미국의 불개입 정책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필리핀 해역에 있던 미 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이동했다. 상륙전 능력이 가뜩이나 모자란 중공군이 세계 최강 미 해군의 7함대를 뚫고 대만에 상륙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마오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1954년 10월 천안문 망루에 오른 마오쩌둥(오른쪽)과 김일성(중국 건국 5주년 열병식).

중공군을 무시했던 김일성

9월 15일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9월 28일엔 서울을 재탈환했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곧바로 스탈린에게 SOS를 날렸다. “스탈린 동지. 만약 소련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미국놈들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시급히 소련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스탈린의 답변은 거절이었다. “이 문제는 중국 마오쩌둥 동지와 논의하시오.” 김일성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날 밤 김일성은 “마오쩌둥 동지. 긴급히 지원군 파병을 요청합니다”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개전 이래 김일성은 거칠 것이 없었다. 남침을 감행한 북한 인민군의 전력은 막강했다. 당시 아시아 국가들 중 전차와 전투기를 모두 갖춘 유일한 군대였다. 미군 참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은 “우리 인민군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공언하곤 했다. 중국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전쟁 상황을 일일이 알려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마오는 김일성에게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곧 부산이 함락될 것”이라며 마오의 충고를 무시했다. 김일성은 전승의 지분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돼 마오에게 지원을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독단적으로 파병 결정한 마오의 속내는

중공 수뇌부에게 전쟁에 개입할 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엄청나게 골치 아픈 일이었다. 마오는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줄담배를 피며 고민을 거듭했다. 외교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 베이징군구 사령관 예젠잉(葉劍英), 부주석 주더(朱德) 등 측근들은 거의 모두 참전을 반대했다. 중공군 개입 찬성은 오직 마오 혼자뿐인 듯했다.

마오는 말했다. “미군은 그렇게 강하지 않소. 전쟁 초반에 미군의 상태를 봤지 않소. 그들은 북한 인민군에 판판이 깨졌소. 미군은 자본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해 전쟁터에 끌려온 사람들이오. 때문에 그들의 전투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나 일본군보다도 약하오.”
측근들의 입장은 이랬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우리의 국토는 폐허 상태입니다. 인민들이 전쟁에 지쳐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을 할 여력이 있을까요?”

당시 만주의 실력자이던 가오강(高崗) 제4야전군 사령관도 결사적으로 참전을 반대했다. 전쟁에 중공군을 투입한다면 자신 휘하의 만주 병력이 가장 먼저 총대를 멜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오강은 이렇게 설득했다. “마오쩌둥 동지, 미국은 원자폭탄이 있습니다.”

마오는 반박했다. “원자폭탄? 그건 종이호랑이야. 우리 중국 인구가 얼만데. 원자폭탄으로 우리를 모조리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나는 1000만 명, 아니 2000만 명 정도의 인명피해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런 마오의 고집으로 중공군 참전은 사실상 이미 결론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10월 8일 마오는 펑더화이(彭德懷)를 지원군 총사령관으로 삼아 한국전 개입을 명령했다.

마오가 파병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순망치한(脣亡齒寒), 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이 위태롭다는 논리였다. 두 번째 이유는 가오강의 세력을 약화시켜 궁극적으로는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만주의 제4야전군은 중공군 중 가장 대규모 최정예 병력이었다. 2차대전 당시 만주는 일본이 대륙 침략기지 삼아 산업화시켰던 곳이다. 덕분에 만주는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업화된 지역이었다. 소련군이 일본군으로부터 압수한 무기들도 모두 가오강 휘하 군대가 물려받았다. 가오강은 자신의 세력과 스탈린의 뒷배를 믿고 마오의 리더십을 위협했다. 마오는 6·25를 통해 이런 가오강을 제거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제4야전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가오강의 세력 약화는 피할 수 없었다.

1950년 9월 대한민국 서울 탈환을 위해 싸우는 유엔군(United Nations forces fighting to recapture Seoul, South Korea, September 1950.). U.S. Army Photo

말 바꾼 스탈린에 분노한 마오

중공군 파병 명령을 내린 다음날인 10월 9일 마오는 청천벽력할 소식을 접했다. 공중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한 스탈린이 말을 바꾼 것이다. “우리 소련 공군은 압록강 북쪽에 있는 중국 영토에 대해서만 공중 지원을 해주겠소.” 원래의 약속이 아닐뿐더러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마오는 폭발했다. “펑더화이 동지. 전 부대는 현 위치에서 대기하시오. 소련의 공군 지원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는데 과연 우리 지상군만으로 압도적 공군력을 가진 미군과 싸워 이기는 것이 가능할까.” 사상 초유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 뻔히 예고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파병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파병을 포기한다면 우리 신중국이 미국과 맞설 힘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이유였다. 10월 16일 마오는 전 사단장을 소집했다. “한반도에서 미군과 맞붙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국 본토에서 싸워야 할 거요. 하지만 미안하오. 우리는 소련 공군에게 약속받은 공군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할 것 같소.”

사단장들은 동요했다. “미군은 상당한 숫자의 비행기와 포병을 갖고 있습니다. 공군 지원이 없다면 대량 인명피해가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방어 진지도 세우기 쉽지 않습니다. 내년 봄에 참전하시지요.”

마오는 묵묵부답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사단장들의 분위기를 읽은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말했다. “이제부터 이번 결정을 따르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호소하는 자는 모두 명령 불복종으로 간주하겠소.” 마침내 10월 19일 밤, 중공군은 예정대로 압록강을 건넜다. 이 사실은 맥아더도 미국 정부도 알지 못했다. 중국은 김일성에게 선수를 빼앗겨 대만 침공의 꿈이 날아갔다. 그런데 대만 침공을 위해 준비한 병력이 한반도로 몰려든 것이다. 한국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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