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서경선 기자] 최근 북한-러시아 준(準) 군사동맹이 부활하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인하대 이주영 교수는 지난 11일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 10층 조영래홀에서 열린 서울대 역사학과 총동문회(회장 안병용)가 주최한 사학인포럼에서 ‘글로벌한 시각에서 본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진보의 핵무장 반대나 보수의 핵무장 주장 모두 이분법적 논리 불과

이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핵무장은 하느냐 마느냐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현실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탄도미사일과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 보유로 핵 잠재력(nuclear latency)을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핵 잠재력이란 핵무기를 실제로 만들지는 않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위반하지 않지만 단기간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일본은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우라늄 재처리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유사시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핵 잠재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핵 잠재력을 확보할 경우 외교적으로 중요한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보가 아예 핵무장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과 신뢰 회복을 시도하는 것은 중요한 레버리지를 포기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보수는 미국에 너무 의존하여 미국 핵공유(한국 핵보유 불필요)를 주장하거나 실현이 어려운 핵무장을 단순한 논리로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핵무장은 국방문제보다 외교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자신이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연구하기 이전에는 평화주의자였고 핵무장을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는 1970년대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연구할수록 기존의 설명으로는 풀기 어려운 의문점들을 갖게 되었다.

기존에는 한국이 미국 몰래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다 미국이 눈치 채고 압력을 넣자 포기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한미 관계와 동북아 지정학에 초점을 맞춰 접근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미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진행 중이었는데 박정희는 1975년 6월 12일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뷰에서 핵무기 개발 문제를 왜 공개적으로 언급했을까? 공개적 언급이 핵무기 개발 시도를 미국과의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보기에는 실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아주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 의문이었다.

또 다른 의문점은 “1975년 여름부터 미국의 압박이 본격 시작된 이후에도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지속되어 왜 어떻게 1976년 초까지 버텼을까, 과연 핵무기 개발이 가능한 시나리오였을까”였다.

미국은 1974년 11월 프랑스가 한국과의 MOU 사실을 알렸고 한국 주재 미 관료도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 가능성을 알렸는데 왜 한국을 바로 압박하지 않았을까? 또한 1975년 3월 주한미대사의 정식 보고에도 불구하고 왜 이때도 적극 압박하지 않았을까?

1975년 여름부터 미국이 본격적으로 압박을 시도했는데도 왜 수개월간 한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단념시키지 못했을까?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이 미국의 안전 보장을 끌어냈던 교훈 돌아봐야

이 교수는 이러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기존에 한미 관계와 동북아 지정학에 갇혀있던 시야를 1970년대 국제질서의 성격 변화와 미국의 대외 정책 변화로 확장했다. 이와 함께 한국에 핵 기술 지원을 추진했던 프랑스의 역할과 행동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했다.

한국 핵무기 개발 시도에 대한 연구를 1970년대 냉전 질서의 변화와 그 속에 놓여 있는 한국-미국-프랑스 3국 관계로 확장하여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새로운 시야와 맥락 속에서 연구를 진행하여 한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와 포기가 갖는 성격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단순한 한-미 관계 문제가 아닌 1970년대 국제질서 변화에 대한 미국, 프랑스, 한국의 대응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였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1970년대 국제 질서(냉전)의 성격과 핵비확산 상황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 들어 오일 쇼크, 미국의 베트남 전쟁 수렁, 소련의 농업정책 실패로 인한 경제 위기가 일어났다. 미국-소련의 국제적 위상과 동맹국들에 대한 영향력 약화, 독일-프랑스의 독자노선 강화와 중국-소련 대립 심화로 냉전의 틀이 흔들렸고 기존 정책은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냉전의 갈등을 완화하고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정책을 마련할 필요를 느꼈다.

또한 프랑스(1960)와 중국(1964)의 핵실험 성공, 일본·서독·이스라엘·스웨덴의 핵무기 개발 시도 등 강대국들의 핵실험 성공과 시도가 잇달았다. 한국·파키스탄·인도 등 미국 핵기술 수입 국가들도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미국과 소련으로서는 핵비확산 정책을 기존의 양자 조약에서 다자주의 레짐으로 변화시켜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미국은 1969년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에서 발 빼기와 유럽 동맹정책(Pivot to Europe)을 추진했다. 베트남 철군, 주한미군 철수가 시도되었고, 한국 정부의 안보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유럽 중심 정책으로 프랑스와의 화해 협력이 중요해졌다.

안보 위기에 빠진 박정희 정부는 핵무기 개발을 검토했다. 프랑스는 반미 독자노선을 추구하던 드골이 실각하고 실용주의적 퐁피두, 데스탱 대통령이 등장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협상이 시도되었다. 한편 드골주의자들이 장악한 원자력청과 그 아래 생고뱅사는 여전히 한국 등에 대한 핵기술과 시설 수출에 관심이 컸다. 이는 새로운 대통령들과 갈등을 낳았다.

국제 질서가 변화하는 가운데 한국-미국-프랑스는 한국 핵무기 개발 시도와 관련하여 삼각 관계를 형성했다. 한국-프랑스는 핵무기 기술 전수와 핵연료 재처리 시설 건설 계약을 맺었다. 미국은 한국과의 원자력협정을 통해 미국의 핵기술과 원료를 제공했다. 프랑스-미국은 핵기술 교류 협상이 진행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핵비확산 레짐 구축에 중대한 장애물로 인식했다. 또한 프랑스-NATO 관계가 유럽 동맹정책의 관건인데 한국-프랑스 계약이 장애물이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계약은 미국의 압박과 미국-프랑스 협상에 따라 해지될 가능성이 있었던 셈이다.

한국-미국-프랑스 삼각관계는 중첩된 딜레마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국은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심각한 안보 위기감으로 미국의 안전 보장 없이 프랑스와 계약을 해지할 의사가 없었다.

프랑스는 국익과 드골주의를 지지하는 국내 여론, 국제적 신인도를 고려해서 한국과 핵기술 전수 계약을 취소할 동기가 부족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 약화와 한국의 심각한 안보 위기감으로 인해 한국에 핵무기 개발 단념을 설득·압박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미국 정책에서 중요해진 프랑스를 포섭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 원자력법과 맥마흔법으로 인해 프랑스가 요구하는 핵기술 전수가 쉽지 않았다.

미국이 닉슨 독트린과 유럽 동맹정책을 수정하기도 어려웠다. 한국 안보 보장과 프랑스 핵기술 지원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고 미국 국방부, 의회 등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미국과 프랑스 관계가 진전되면서 한국 핵무기 개발 포기가 이뤄졌다. 미국의 프랑스에 대한 태도가 ‘밀당’에서 ‘구애’로 변화했다. 미국에 핵 기술 지원을 요구·압박하던 프랑스도 미국 주도 NSG(Nuclear Suppliers Group)에 가입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NSG의 더 엄격한 핵비확산 규정에 따라 한국-프랑스 계약(재처리 시설 시공) 승인이 지연되었다.

프랑스가 한국과의 계약 실행을 계속 지연하는 등 프랑스 입장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의 협의가 시작되었다. 미국 포드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안전 보장을 약속했고 한국은 프랑스와 계약을 취소했다.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면서 한국-미국 관계가 개선되었다.

이처럼 한국 핵무기 개발 시도는 1970년대 국제 관계 변화에 대한 각국의 대응들이 상호 작용한 결과라는 국제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 관계 재정립을 통해 냉전이 이완되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리스크를 제거해 핵비확산의 글로벌 레짐을 성공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기존의 독자노선을 버리고 미국과 동맹을 강화함으로써 국제관계 변화에 대응했다. 핵무기 기술 판매(독자노선)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의 핵무기 기술 지원을 받았다.

박정희 정부는 프랑스의 기술 지원을 받아 추진하던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안보 보장을 약속받았다.

핵잠재력 확보는 변화하는 국제 질서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레버리지

이주영 교수는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는 없으며 언제나 관계가 변화할 가능성에 대비해 다양한 옵션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핵 잠재력 확보로 상황 변화에 따라 다양한 전략에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1969년 닉슨 독트린을 계기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촉발한 안보 위기에 대응하여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기 때문에 미국과 관계에서 레버리지로 활용하여 안전 보장을 약속받았던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핵무기 개발에 실패했지만 미국으로부터 안전 보장과 원자력 기술·재정 지원을 받게 되어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외교 정책을 수립할 때 관점과 시야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핵무기 개발을 레버리지로 활용하여 성과를 얻었지만 당시 냉전 균열이라는 국제질서 변화에 적응하기보다 기존의 냉전 프레임으로 대응했던 것이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의 냉전 프레임에 기반한 독재 정치가 미국 카터 정부의 새로운 인권 정치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면서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굉장히 변화무쌍한 국제 질서 속에서 이 변화를 이해하고, 긴밀하고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늘날 국제질서 변화에 대한 기민하고 유연한 대응방안 중 하나가 바로 핵 잠재력 확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이주영 교수는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인문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인하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문사회과학과 융합(2019)’, ‘세계 디지털 인문학의 현황과 전망(2019)’, ‘냉전사 연구의 다변화: 새로운 시도들과 딜레마(2022)’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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