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8월 1일 연암 박지원은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해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당시 박지원은 일신상으로 평범한 선비였으나 가문으로는 큰 배경을 갖고 있었다. 사절단 수장인 박명원은 영조의 부마였는데, 박지원의 8촌형이었다.

그렇기에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사절단에 들어갔다. 사절단은 숙소에 머물면서 건륭제의 고희연을 기다렸다. 그 와중에 박지원은 밤마다 몰래 나와 연경 곳곳을 누비었다.
특히 청나라의 여러 관료들과 만나 필담으로 교우하였다. 5일 열하(熱河)에 있던 건륭제로부터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오라는 명을 받았다.

사절단은 4박 5일 동안 강행군을 하면서 열하로 갔다. 연경에서 열하까지 직선거리는 225㎞이다. 하지만 해당 구간은 산세가 험하고 하천이 많다. 사절단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만리장성을 넘었고 산과 강을 지났다.

박지원은 이를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 자세히 묘사했다. '고북구'는 만리장성이 지나는 베이징 북부의 마을이다.
'일야구도하기'는 말 그대로 하룻밤에 강을 9번 건넜다는 뜻이다. 그만큼 열하로 가면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는 은유다. 열하에 도착한 뒤 실학자인 박지원은 조선과 전혀 다른 국제 정세를 처음 보았다.

박지원은 귀국해서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26편의 《열하일기》로 기록하였다. 열하는 오늘날 허베이(河北) 성 청더(承德)다.

청대 열하에 황제의 여름 행궁인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었다. 피서산장은 1703년 강희제 때부터 세워졌다. 건설은 옹정, 건륭 등 세 황제를 거쳐 89년 동안 지속되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현존하는 전통 정원이자 황실 원림 중에서 가장 넓고 웅장하다. 실제로 피서산장의 전체 규모는 10만㎡에 달한다.

크게는 궁궐, 호수, 평원, 산악 등으로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피서산장 주변에 티베트불교 위주의 사찰 12개를 건립하였다. 그중 여덟 사찰은 청조가 직접 관리하면서 '외팔묘(外八廟)'라고 불렀다.

외팔묘 사찰은 티베트와 한족 전통양식을 결합하여 지었다. 그렇기에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왜 열하에 별장을 지었을까?
첫째, 자연환경적인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열하는 베이징보다 위도가 높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여름에 시원하다. 또한 주변에 온천이 많아 편안하게 휴양하기 좋다.

게다가 피서산장은 자연풍광이 아름다웠다. 청조가 여름 행궁으로 낙점하여 조성하면서 더욱 멋내었다. 따라서 강희제와 건륭제는 멋진 경치를 가진 36경을 따로 지정하여 감상하였다.

둘째, 만주족의 정체성과 상무정신을 고양하기 위해서였다.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만주족 귀족들이 정주민으로 변한 현실을 목도하였다.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한족을 지배해서 건국하였다. 강희제는 북방 유목민족 고유의 기질을 잃어가고 있는 만주족의 상황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열하 북부에 목란위장(木蘭圍場)을 세웠다. 목란위장은 만주족의 군사적인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한 황실의 사냥터이자 군사 훈련장으로 활용하였다.

강희제는 여름마다 만주족 귀족들과 몽골의 부족 지도자들을 목란위장에 초청해서 사냥 대회를 열었다. 또한 팔기군의 무장들을 불러 함께 야영하면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피서산장은 이처럼 만주족으로써 고유성과 용맹, 기상을 잃지 않으려는 강희제의 염원이 담겨있는 곳이었다.

손자인 건륭제는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자신의 통치 아래 새로이 청의 영토로 포함시켰던 티베트와 신장(新疆)의 민족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외교무대로 활용하였다.

박지원이 열하를 방문했을 때는 건륭제의 초청을 받아 티베트불교의 2인자인 판첸라마(班禪喇嘛) 6세가 와 있었다. 건륭제는 열하를 최초로 방문한 조선의 사절단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박명원과 대화하면서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수미복수지묘(须弥福寿之庙)로 가서 판첸라마를 만나라는 것이었다. 수미복수지묘는 건륭제가 판첸라마를 위해서 지은 사찰이었다.

사절단 내에서는 판첸라마를 만나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성리학을 숭배하는 조선 사대부의 입장에서 불교 사찰을 찾아 승려에게 절을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났다. 하지만 건룡제의 명령을 거부할 순 없었다.

티베트와 티베트불교를 우대했던 건룡제의 입장은 1771년에 자신의 환갑과 황태후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서 건립한 보타종승지묘(普陀宗乘之廟)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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