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궈(吳邦國) 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국회의장 격)이 8일 별세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후진타오 시대에 권력 서열 2위에 올랐던 우방궈(吳邦國) 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국회의장 격)이 8일 별세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전인대 상무위, 국무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는 이날 공동 부고문을 발표하고 우 전 위원장이 오전 4시 36분(현지시간)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향년 84세다.

1941년 중국 안후이성 페이둥에서 태어난 우 전 위원장은 1960년부터 1967년까지 칭화대 무선전자학과에서 공부했다. 문화대혁명(1966∼1976년) 시기인 1967년 상하이 전자관3공장 기술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상하이시 전자·전기공사 등에서 근무하다 1983년부터 중국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 상무위원과 부서기를 차례로 역임했다.

중국 당정은 “문화대혁명 기간 그는 당성(黨性) 원칙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견지하면서 실제 행동으로 저항했다”고 평가했다. 또 고인이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정신을 적극적으로 이행해 상하이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우 전 위원장이 당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국유기업 퇴직 노동자 재취업과 싼샤(三峽)댐 및 도로·항구·철도 등 인프라 건설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상하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우 전 위원장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이끈 ‘상하이방’(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대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장 전 주석 재임 시기인 1994년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에 임명됐고, 이듬해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돼 국유기업 개혁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후진타오 정권이 출범하자 최고 지도부에 진출, 2003년 공식 서열 2위(현재는 3위)인 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올랐으며 10년간 자리를 지켰다.

고인은 한반도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인대 상무위원장 시절이던 2003년 북한이 제1차 6자회담 이후 회담 테이블에 복귀하지 않으려 하자 9월 서울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만난 뒤 10월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을 만나 후진타오 주석의 친서를 전달하며 설득했고, 이를 계기로 북한이 제2차 6자회담(2004년)에 복귀하게 된다.

우방궈상하이방6자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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