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야학교사 때 김병곤 만나
81년 결혼했으나 부부로 짧은 9년
남편, 민청학련·민청련 사건 등
거듭된 옥고로 몸 상해 37살에 떠나
‘부부가 이승에서 산 삶 고작 96살’

 

85년 남편 구속 뒤엔 직접 농성투쟁
민청련 가족들과 민가협 설립 이끌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경실련 등
좋은 세상 위해 어디든 달려가 헌신

 

 

박문숙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 웬만한 사건이나 인물은 가뭇없이 잊혀도 이상할 게 없는 세월이지만, 어떻게 문숙이를 잊을 수 있을까? 그녀는 2014년 4월2일, 암 투병 끝에 59살로 세상을 떠났다. 민주화 운동가들에게조차 생소한 이름이지만, 박문숙은 한평생 군부독재 역사의 무게와 상처를 온전히 감당했던 여전사다.

박문숙은 1955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서울여대 영문학과에 입학, 학내 서클 녹수회에서 활동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발을 담그게 된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고교 선생으로 근무하다가 노동운동에 투신하려고 위장 취업하면서 명동 향린교회의 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그녀는 이 야학에서 김병곤을 만나 1981년에 결혼했으나, 부부로서 두 사람이 함께한 삶은 아홉 해에 불과했고, 두 사람 합한 이승에서의 삶은 고작 96살이었다.

김병곤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의 주모자로 군사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일갈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1973년 최초의 반유신 서울대 시위, 1974년 민청학련사건, 1978년 동일방직 유인물배포 사건, 1985년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 1987년 구로구청 사건 등으로 감옥살이를 한 투사였으나, 거듭된 옥고로 건강을 해쳐 1990년 37살로 타계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극악을 부리던 1984년 가을, 서울 망원동 우리 셋방에 박문숙이 쌀 포대를 하나 들고 찾아왔다. 비슷한 시기에 나의 남편 김희택과 김병곤이 민청련에서 상근 활동을 시작해 진작에 박문숙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대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문숙은 큰 키에 단정한 용모, 말투까지 정중해 딱 공무원이나 선생님 같았다.

1985년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의 거리시위가 잦았다. 그해 7월, 김병곤이 남영동 대공분실에 강제연행되었다. 그해 5월 서울대에서 각 대학 대표들이 모인 연대회의가 빌미였지만, 이는 민청련 조직 말살의 신호탄이었다. 김병곤에 이어 김근태, 이을호 등 중요 간부 9명이 구속되고 7명이 수배되자 민청련 집행부는 완전히 붕괴하였지만, 남은 회원과 구속자 아내들이 민청련 사무실에서 농성을 이어가면서 공안 요원들과 대치했다.

청년, 학생, 재야인사, 노동자, 농민 등 구속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민청련 가족들이 앞장서서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을 출범시켜, 초대 총무 인재근이 이를 총괄했고 박문숙이 재정을 맡았다. 민청련의 첫 번째 구속자 가족 박문숙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민가협을 꾸려나가는 일, 어린 두 딸을 챙기는 일도 힘든데, 교도소에서의 투쟁으로 안양교도소, 안동교도소, 공주교도소, 춘천교도소로 줄지어 이감한 김병곤의 면회를 다니기도 숨찼다.


‘13대 대선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의 점거농성’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6개월 뒤인 1988년 6월 위암 3기 판정을 받아 형집행정지로 출소했으나 병세가 위중해 서울대병원 의사들조차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문숙이는 그 상황에서도 ‘당신을 절대 죽게 하지 않을 거야!’ 하며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함을 보였다. 항상 환하게 화장을 하고 단정한 차림으로 남편을 돌보며, 손님 대접하듯 차와 과일을 준비해 면회객을 맞았다.

문숙의 정성 어린 보살핌에도 김병곤은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남편의 부재 속에서도 문숙은 굳건히 김병곤이 이루고자 했던 더 나은 세상을 앞당길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자리든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 경실련 자원재활용센터 사무국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 녹색환경운동 이사장, 제4대 경기도의회 의원, 6월항쟁계승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등 그녀를 부르는 곳에는 어디든 있었다.

1994년, 김병곤에 이어 경기 광명 철산동의 민청련 삼총사(김병곤, 이범영, 김희택) 중 이범영이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6년에는 나도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을 받은 후 남편의 고향으로 귀촌한다고 하니 문숙이가 인사동의 어느 옷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자기 옷을 맞추려나 했는데 “언니, 광주 가서 너무 초라하게 보이지 말고 이쁜 옷 입고 화장도 꼭 하고 다녀!” 하며 잇꽃 다홍색 재킷에 쪽물 통치마를 사주었다.

2014년 4월1일, 한밤중에 이범영의 아내 설이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문숙이가 지금 위독하다’고 전화를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근무할 때 건강검진에서 유방암을 발견했는데, 딸들에게조차 제대로 알리지 않고 조용히 혼자 대처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랴부랴 2일 오전 민청련 동지들이 달려갔을 때는 민머리에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의식 없이 딸에게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민주화운동의 끈끈한 동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지아비, 누구보다도 더 존경했던 선배를 떠나보낸 후 24년, 박문숙은 그렇게 ‘김병곤’으로 살다가 속절없이 그의 곁으로 갔다. 부디 짧디짧았던 인연을 하늘에서라도 영원히 이어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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