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너의 이름

그날 술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는 가물가물했지만, 뚜렷하게 기억하는 한 장면이 있었다. A가 술잔을 들고 내 옆으로 왔을 때, 나는 A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2년 동안 A를 못 봤다고 해도, A를 알아왔던 세월이 10년이다. 그렇다고 A의 이름이 아예 기억 속에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A의 이름을 별다른 도움 없이 기억해 냈다.

이 상황을 현학적인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A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느낌(Feeling Of Knowing, FOK)'이 있었지만, A의 이름은 나의 '혀끝(Tip Of Tongue, TOT)'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FOK와 TOT, 말은 어렵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경험하는 현상이다. 특히 사람, 지명, 건물 등 고유명사에 대해 순간적으로 기억을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를 현대 뇌과학은 기억의 관계성이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기억은 해마라는 작은 뇌 부위에서만 저장되는 것 아니야? 기억의 관계성이라니 무슨 말이야?"

해마는 기억의 중추임은 틀림없다. 해마가 없어지면 기억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마라는 유한한 공간에 무한대의 기억이 저장될 수 있다는 건 애당초부터 억지스러웠다. 이 억지를 타파하기 위해 '기억은 뇌세포의 관계로 저장된다'는 이론이 등장했다. 뇌세포는 유한하지만 이 관계는 무한하다는 것인데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됐다. 이는 바둑판의 원리와 같은데, 가로 19개*세로 19개, 즉 361점들은 유한하지만, 이들의 관계로 이루어진 바둑 수는 무한대이다.

그런데 기억이 관계성으로 설명되면서 기억의 강도는 빈도와 비례한다는 것이 더 명확해졌다. 바둑에서 자주 두어지는 수는 초보자도 쉽게 기억하지만, 어쩌다 두는 수, 특히 묘수는 프로 바둑 기사들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유명사는 바둑판으로 치면 자주 두지 않는 수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라는 일반명사는 여러 자동차를 통해 하루에도 수십 번 접할 수 있지만, 좌철수라는 고유명사는 좌철수를 만났을 때만 떠올릴 수 있다. 고유명사는 본질적으로 기억의 관계성이 적다. 그런 까닭에 고유명사에 대해 FOK, TOT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남들보다 지나치게 FOK, TOT를 자주 겪는 건 치매의 전조 증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도 있다.
 

FOK, TOT는 치매 전조 증상인가?

 
'알고 있다는 느낌(FOK)'과 '혀끝에 머무는 것(TOT)'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전문가도 있다. FOK는 아는 것이지만 순간적으로 기억을 못 해내는 것일 뿐이고, TOT는 알고 있던 것을 정말로 까먹은 것이거나 혹은 알고 있다고 착각한 상태라는 이론이다. 미국 플로리다대학 연구팀이 FOK와 TOT일 때 각각 뇌의 반응이 다르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 이론은 확고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후속 연구에서 이에 반하는 결과들이 나와 여태껏 논란이다.

이런 논란과 함께 FOK 혹은 TOT가 치매의 전조 증세일 수 있다는 연구들도 이어지고 있다. 이 연구 중에는 국내 연구도 있는데, 대구대 연구팀은 치매를 진단받지 않은 50대~70대 60명을, 주관적으로 기억력이 감소됐다고 호소하는 30명과 그렇지 않은 30명으로 나눴다.

이들에게 어떤 사물을 보여주고 이름을 묻거나 문장에 빈칸을 두고 적절한 단어를 채우도록 했다. 연구팀은 이를 TOT test라고 정의했는데, 두 그룹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주관적으로 기억력이 떨어진 그룹이 객관적인 test에서 TOT 현상이 훨씬 많이 관찰된 것이다. 연구팀은 TOT test로 치매를 매우 이른 시기에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엿봤다고 언급했다(The tip-of-the-tongue phenomenon in older adults with subjective memory complaints, PLOS ONE).

다른 나라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이어졌고, 특히 인지 기능이 떨어질수록 FOK 혹은 TOT 현상이 많아지는 것은 팩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연스러운 현상인 줄 알았는데 치매의 전조 증세일 수 있다니 서글퍼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역은 성립되지 않고 있다. FOK, TOT가 많다고 인지 기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거시기'는 메타인지

영화에서 흔히 보는 형님과 동생의 대화를 살펴보자.

"형님, 갸(누군가)가 거시기(무엇을) 해승께 내 맘이 어찌나 거시기(어떤 감정)한지 모르겠소."
"아따, 동상이 참말로 거시기(어떤 감정) 했겠네."


어떤 단어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을 때 대명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형님과 동생의 대화에서도 대명사를 사용한 탓에 누가 무엇을 했는지, 그래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형님과 동생은 대화를 매끄럽게 진행하고, 관객들 역시 몰입하며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정확한 단어가 혀끝에 머무른 상태에서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건 왜일까?

미국 콜로라도대학 연구팀은 이를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설명한다. 메타인지는 현상을 인지하는 한 차원 높은 기술로서 언어가 전달하는 정보를 뛰어넘는다. 형님과 동생은 '거시기'를 말하는 톤과 매너로 그 행위가 무엇인지 그 행위로 어떤 감정이 생겼는지 더 깊은 정보를 담는다는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면책 조항: 이 글의 저작권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이 기사의 재게시 목적은 정보 전달에 있으며, 어떠한 투자 조언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만약 침해 행위가 있을 경우, 즉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정 또는 삭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