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원(66)씨에게는 열차 군용 칸에서만 먹고 자던 시절이 있었다. 1966년으로 기억한다. 부산진역과 용산역까지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당시 ‘12열차’라 불리던 완행기차였다. 용산역에서는 입소하는 군인들이, 부산진역에서는 전역하는 군인들이 탔다. 군인들에게 애교를 떨고 노래를 불러주며 밥을 얻어먹었다. 헌병들의 환심을 샀기에 쫓겨나지 않았다. ‘철도공안’한테만 걸리지 않으면 되었다. 무리에 섞이지 않은 8살 꼬마의 나홀로 극한 생존법이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했지만, 열차는 시설보다 행복했다.

장씨는 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알로이시오 초·중·고등학교 50년사’와 ‘마리아수녀회 서울이야기 44년’ 등의 자료집을 제공했다. 6살부터 14살까지 영화숙·재생원과 형제복지원 등 수용시설에서 지내며 탈출을 반복했지만 결국 알로이시오(1930~1992, 한국명 소재건, 미국명 알로이시오 슈월츠) 신부의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던 ‘소년의 집’에 안착해 삶을 바꿀 수 있었다. 이곳과 관련된 자료집을 남김없이 모아놓은 일이 수용시설 직권조사에 도움을 줄 줄은 몰랐다.(소년의 집은 1998년 초·중·고 모두 ‘알로이시오 학교’로 개명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무상교육을 제공하는 ‘소년의 집’이 죄를 지은 아이들을 수용하는 ‘소년원’으로 오해받기 쉽다는 이유도 작용했다.)


진실화해위에 이 자료집이 중요한 이유는 1950~60년대 부산 최대의 집단수용시설이었던 영화숙·재생원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영화숙·재생원 원장 이순영을 고발해 시설폐쇄를 이끌었고, 이곳 원생들 상당수가 부산시 서구 암남동 산7번지 ‘소년의 집’으로 전원됐다. 장철원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8월부터 영화숙·재생원에서의 굶주림·구타·성폭행·강제노역·횡령 등 불법 행위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직권조사 중인 진실화해위로서는 이 책들을 통해 피해자 진실규명을 위한 정보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21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철원씨는 자신이 소장해온 알로이시오 학교 사진집 등을 보여주며, 극적으로 비교되는 소년의 집과 여타의 수용시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보여준 책 속에는 행색이 남루한 영화숙·재생원 아이들의 사진이 여러 장 실려있었다. 언론에 공개된 적 없는 것들이다. “(영화숙·재생원에서) 소년의 집으로 전원된 뒤 처음 한 게 옥상에 올라가 햇볕 쬐는 거였어요. 다들 부스럼도 많고 질병이 있었거든요.”


그는 6살 되던 1964년께 아버지의 매질이 무서워 대구 동인동 집을 나와 대구역을 배회하다 단속반에 붙들렸다. 그리고 대구희망원-재생원-남광학원-형제복지원-서울아동보호소-영화숙-재생원으로 긴 수용시설 생활이 시작됐다. 각 시설에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갇혀 지냈다. 예외 없이 모든 시설에서 도망쳐 나왔고, 다시 잡혀갔다. 도망 나올 때마다 부산 광복동·서면·수정동 등에서 앵벌이나 넝마주이를 했고, 열차에서 먹고자기도 했다.

“영화숙이 가장 악독했어요. 기합이 심했거든요. 36방이라는 게 기억나요. 좌향좌, 우향우, 흩어져 등 군인들이 하는 36개 군사동작 훈련을 시켰는데 그거 못한다고 엄청 때리고 기합 줬어요. 도망갔다 다시 잡혀오면 전체가 보는 앞에서 발바닥이 하늘로 향하게 눕히고 피가 나고 퉁퉁 붓도록 맞았고요. 그때 고작 10살이었는데요.”


1972년경 소년의 집으로 전원되니 모든 게 달랐다. 구타가 없었고, 먹을 게 충분했다. 의식주 수준이 높았다. 여기서부터 초등교육도 받았다. 송도국민학교(초교)를 거쳐 자체 개교한 소년의 집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차례로 개교한 소년의 집 중학교와 기계공고를 다녔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주장이었다. 부산 대표로 소년체전에 나가기도 했다.

6살 때 집 나와 오랜 수용소 생활
형제복지원·영화숙·재생원 등 거쳐
알로이시오 신부 세운 ‘소년의 집’까지
“영화숙, 군사훈련 시키며 엄청 구타
도망치다 잡혀 발바닥 피나게 맞아
신부님 세운 곳 오니 모든 게 달라져”

최근 ‘알로이시오 학교’ 자료 등 진화위에
영화숙 등 수용시설 직권조사 도움될 듯

그는 1989년부터 루게릭병을 앓다 1992년 필리핀에서 선종한 알로이시오 신부에 관해 말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1961년 민간 원조기관인 한국자선회를 설립해 한국에서 구호활동을 했다. 부산교구 송도 성당의 주임신부로 재직하던 1964년 마리아수녀회를 창설했다. 마리아수녀회는 부산 서구(현 사하구) 장림동 영화숙·재생원 앞에 진료소(1967년)·구호소(1969년)·구호병원(1970년)을 차렸는데 이는 영화숙·재생원 원장 이순영을 몰아내고 원생들을 구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부님은 항상 정의구현과 진리탐구에 관해 말씀하셨어요. 불의 앞에서 기죽지 말라고 하셨고요. 세상은 무한한 경쟁 속에 있다면서 성실하게 살라고 하셨어요. 주일 미사는 절대 빠뜨리지 말라며 신앙생활도 강조하셨는데, 제가 먹고살기 바빠 그건 잘 못 지켰네요.”

알로이시오 신부는 1981년 4월 그에게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던 서울 마리아수녀회 갱생원에 취업해 철강 교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1987년까지 교사 일을 했고 그 뒤로는 친구와 함께 서울 이화여대 앞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다. “소년의 집으로 온 뒤 다른 수용시설에서 어렵게 산 일이 파묻혀버렸어요. 일반 가정 사람들보다 윤택하게 살고 수준 있게 배웠다고 자부하거든요. 형제복지원이나 영화숙·재생원 이야기를 웃으면서 합니다. 트라우마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트라우마가 없다고 했지만, 그는 영화숙·재생원 이야기를 하다 목이 멨다. 50년 넘게 흘렀지만 그 고통과 분노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은 듯 했다. 왜 그 시설들은 다 형편없는 지옥이었을까. 왜 아이들로 하여금 탈출만을 꿈꾸게 했을까. 왜 단 한 곳이라도 알로이시오 신부처럼 하지 못했을까. 왜 굶기고, 교육을 안 하고, 일만 시키고, 날마다 때렸을까.

장씨는 말했다. “그 당시의 국가 수준이 그만큼 낮았다는 거죠. 선진국에서 사회복지사업을 배워와서 운영했다면 그러지는 않았겠죠. 오로지 사익만을 위했잖아요. 운영비 착복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죠. 제사보다 잿밥에만 눈독 들이듯….”

그도 지난해 초가을 진실화해위로부터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직권조사를 받았다. 형제복지원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신청 기회를 놓쳤다. “너무나 많은 국민이 모르고 지내온 시대의 일부분이죠.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게 널리 알려지면 피해자들에게 힘이 될 거예요. 저는 그래도 어려운 고비를 이겨냈어요. 우리 딸들에게도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아요. 알로이시오 신부님 덕이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그분이 아버지입니다. 그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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