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덥죠?” (강사)
“네….” (A군)
“이럴 땐 ‘더워서 아이스크림 먹고 싶네요’라거나 ‘여름 휴가를 빨리 가고 싶어요’처럼 파생 대화를 해야 해요.” (강사)
“고1이라 여름방학 때 공부만 해야 하는데요?” (A군)
“그럼 여름이 가장 좋았던 추억을 물어보세요. 상대가 관심 있는 주제로 얘기를 이어가야 해요. 그게 공감의 시작이에요.” (강사)

지난달 25일 서울 강남의 한 스피치 학원에서 열린 공감대화법 3차 수업 ‘주파수 맞추기’의 실전연습이 진행됐다. 한성이 강사는 ″상대가 관심 있는 주제로 얘기를 이어가는 것이 공감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이찬규 기자

A군(16)은 강사의 말을 듣고 종이에 ‘상대의 관심을 끄는 대화’라고 적었다. 지난달 25일 서울 강남의 한 스피치 학원에서 열린 공감대화법 3차 수업 ‘주파수 맞추기’의 실전연습 중 한 장면이다. 수강생 5명은 강사와 날씨·여행·음악 등 일상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는 연습을 했다. 앞선 수업에선 “오”, “대박” 같은 맞장구치는 법도 훈련했다.

실전연습 중 가장 긴 대화는 4분가량 이어졌다. 수강생 박은지(35)씨는 ‘최근 본 영화가 뭐냐’는 강사 질문에 “기생충 이후로 영화를 안 봤다”고 답한 뒤 “아이를 키우다 보니 기생충 영화 속 집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강사와 ‘아이’라는 공통분모를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 도중 “우와” 같은 감탄사도 내뱉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뼉을 치며 호응하기도 했다. 한성이(44) 강사는 “비언어적 신호까지 잘 활용해 대화를 잘 이끌었다”고 칭찬했다.

최근 공감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 수업이 성행하고 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이 늘면서다. 사진은 지난 25일 서울 강남의 한 공감대화법 수업 시간. 이찬규 기자

최근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공감학원이 성행하고 있다. 이른바 MBTI(마이어스 브릭스) 성격유형 검사 결과 ‘T’(Thinking·사고형) 유형 사람들에게 공감 능력이 발달한 ‘F’(Feeling·감정형)처럼 보이도록 가르치는 학원들이다. 주로 스피치·연기학원 등에서 대화 기술이나 감정 조절법 등을 강의하는 식이다.

보통 6~10차에 걸친 수업에선 대화 도중 적절한 리액션 방법부터 시작해 유형·상황별 답변 예시 등을 배운다. 수강생의 고민을 상담해주고 맞춤형 실습도 한다. 이 학원의 경우 한 달에 두 번씩 총 8회 수업인데, 인기가 많아 수강 대기자도 7명이나 있었다. 다른 공감학원도 수강문의를 하니 “지금 당장 들을 수 있는 수업이 없다”, “자리가 남으면 연락하겠다”고 답했다.

차준홍 기자

수강생은 주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이다. 5살 아이를 키우며 교사로 일하는 워킹맘인 박씨는 “학부모 모임에서 공감하는 척조차 못 하면 육아법도 공유 받을 수 없다”며 “아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학원에서 배운 걸 아이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공감학원이 유행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서로에게 더 많은 ‘공감’을 요구하는 ‘공감 갈증 사회’로 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람의 성격을 16가지로 분류하는 MBTI 테스트가 젊은 층을 시작으로 4~5년 전부터 대유행한 게 발단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MBTI 유형 중 사고형(T)과 감정형(F)으로 집단을 나누기 시작했다.

차준홍 기자

소셜미디어(SNS)에선 T·F형을 구별하는 “우울해서 빵 샀어” 등 문장으로 반응을 묻는 놀이도 유행했다. 어떤 빵을 샀는지, 왜 하필 빵을 샀는지 등을 물으면 T형, 왜 우울했는지부터 물으면 F형으로 구분하는 식이다. “너 T지”, “F 호소인” 등의 말은 T유형을 비판하는 하나의 밈(meme)이 됐다.

직장인 장모(34)씨의 경우 평소 무뚝뚝한 말투와 표정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극T형’으로 찍혔다고 한다. 장씨는 “상사로부터 ‘T라서 그런가? 보고서가 공감이 안 되네’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으니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동료들과 판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돌아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슬픔도 못 느끼냐’고 타박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청소년들도 공감 갈증 현상을 겪고 있다. 중학생 B양은 “조금만 T성향으로 이야기해도 ‘싸패(사이코패스)라는 말을 들어 상처받았다”며 “말투나 대화법이 서투를 뿐이지 친구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고 토로했다. 청주의 한 상담교사는 “친구로부터 ‘내가 아프다는데 위로는 안 하고 병원부터 가자고 하냐’는 말을 듣고 상담실을 찾는 경우가 많다”며“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못해 친구들과 교류하며 공감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울 기회가 없어서 같다”고 말했다.

T유형이 모인 오픈 채팅방에서는 T유형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하소연한다. 최하늘(29)씨는 “F유형은 공감을 잘한다면서 정작 T유형의 고충은 왜 공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픈 채팅방 캡처

전문가들은 공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자칫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공감 강요, 공감 중독 사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상황별 답변을 외우거나 MBTI 문항을 미리 파악해 F성향으로 세탁·위장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이모(29)씨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면, 의식적으로 F성향인척 리액션을 크게 하는 등 공감하는 척한다”며 “이성적이게 보이면, 첫인상이 좋지 못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일부는 T성향의 오픈 채팅방에 참여해 공감 강요 상황을 하소연한다. T유형이 모인 오픈 채팅방을 자주 찾는다는 최하늘(29)씨는 “F유형은 공감을 잘한다면서 정작 T들의 고충은 왜 공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관계 중심적이고 배타적 동류 의식도 강하다. 정서적 공감을 과다하게 강조하면 강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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