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비록 지금은 태어난 성별대로 살고 있지만, 졸업 뒤 동창회 같은 자리에서 모였을 때 친구 겉모습이 (다른 성별로) 달라져 있더라도 놀라지 말고 그 친구를 환영하고 지지해줘야 해. 알겠지?”

대학생 이선화(22)씨는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한 말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선화씨는 늘 궁금했다.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는데, 왜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지?’ 선생님 덕분에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의문투성이였던 자신의 성정체성 또한 또렷해졌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됐죠.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어요. ‘해방감’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아요.”

3월31일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고 이들이 겪는 차별과 배제를 알리기 위한 국제적 기념일인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낯설지 않지만, 트랜스젠더의 삶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은 여전히 좁다. 성확정 수술이나 가족관계등록부에 적힌 성별 변경을 하지 않는 이들은 종종 ‘가짜’로 치부된다. 성확정 수술 없이 법적 성별을 바꾸길 원하는 트랜스여성(남성 신체로 태어났으나 성정체성은 여성)과 성확정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트랜스여성,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성정체성을 지닌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등 세 명의 이야기를 통해 남·여 이분법적 구도에서 수술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인식과 법제도, 성별 고정관념이 트랜스젠더의 ‘나답게 살 권리’를 어떻게 억압하는지 들여다보았다.


수술 증명 요구하는 법원

중1 때 자신이 트랜스여성임을 깨달은 선화씨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해 가족에게 커밍아웃했다. 가족은 곧장 그를 병원(정신건강의학과)으로 데려갔다. 의사는 “용모가 전혀 여성스럽지 않다”며 선화씨가 트랜스여성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2년 가까이 약을 먹고, 복용량도 늘려봤지만 나아지질 않았다. “학생들끼리 ‘네 엄마가 여자긴 하냐’는 패드립(부모를 욕하거나 놀리는 말)을 주고받는 남고를 다니면서 제 정체성을 꽁꽁 숨겨야 했어요. 상자 속에 틀어박혀 사는 기분이었죠.” 그러던 그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날은 대학 입학 직전인 2021년 2월20일. 호르몬 치료를 받고 여성으로 발돋움하는 첫날이었다.

선화씨에게 성확정 수술은 “인생 목표”다. 하지만 ‘특발성 심실빈맥’(심장마비를 초래할 수 있는 불규칙한 심장박동이 지속되는 질환)이 있어 당장 수술을 받을 수 없다. 그래도 성별정정 허가 신청을 하기로 했다. 다수의 법원이 대법원 예규(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 신청 사건 등 사무처리 지침)에 근거해, 외부 성기 성형수술과 생식능력 제거 확인서 제출을 요구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녹록지 않은 도전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성확정 수술 등을 확인해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법원 판단은 “인격권 침해”라며 대법원장에게 예규 변경을 권고했다. 국회의장에겐 성별정정 기준 등을 규정한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다. 인권위 권고는 2024년 3월 현재 현실이 되지 못했다. 선화씨는 다짐한다. “성별정정이 될 때까지 들이박을 거예요. 제 삶이 걸린 문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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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마저 위협하는 차별

신체 겉모습과 주민등록번호 성별 표시가 다른 트랜스젠더는 일터에서 불이익과 차별에 노출된다. 30대 트랜스여성 ㄱ씨는 2022년 7월 취업 당시 원피스를 즐겨 입고,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르고 다녔다. 회사는 그를 여성이라 여기고 채용했으나 ㄱ씨가 제출한 주민등록등본상 성별은 남성이었다. 채용 과정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10개월 뒤 회사 쪽은 명확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를 저성과자로 분류해 권고사직을 종용했다. 재직 기간이 1년이 안 된 ㄱ씨는 퇴직금조차 받지 못한 채 회사를 나와야 했다.

화가 난 ㄱ씨는 성확정 수술을 마음먹었다. 우선 은행에서 3500만원의 신용대출을 받았다. 그러곤 지난해 여름 홀로 타이로 가 성확정 수술을 받았다. 비용은 총 3000만원. ‘수술 뒤 못 깨어나면 어떡하지’, ‘부작용이 생기면 어떡하지’, ‘대출금은 나중에 어떻게 갚지’, 온갖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런데도 포기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취업해야 하니까요.”

국가인권위원회가 2020년 펴낸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최근 5년간 구직 경험이 있는 19살 이상 트랜스젠더 467명 중 225명(48.2%)이 구직·채용 과정에서 외모·복장·말투·행동 등이 ‘남자 또는 여자답지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주민등록번호상 성별과 외모가 일치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은 응답자도 126명(27%)이었다.

현재 ㄱ씨는 다달이 월세 25만원, 호르몬 치료비 1만원, 대출 원리금 약 5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공장, 콜센터, 택배 물류센터 등을 전전”한다. 지난해 말 성별 정정을 마친 ㄱ씨는 수술 뒤 자신의 몸에 만족한다. “후유증이 다 가시진 않았어요. 그래도 ‘진작 이 몸으로 살았다면 내 삶은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모든 트랜스젠더가 성확정 수술을 받고 싶은 것도 아니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수술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은 남자에요, 여자예요?

남성과 여성. 이분법적 구분이 포용하지 못하는 삶도 있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인 직장인 이아무개(25)씨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여성다운 외모와 행동을 강요받는 게 답답하다.

이씨는 2022년 3월부터 1년 동안 약 15곳의 사무직이나 접수대(안내데스크) 업무에 입사 지원을 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가족들은 ‘여성다운 외모’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이 안 되는 거라며 그에게 “살을 빼고 머리카락을 기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여성으로 여기는 일이 불편하다. 유방을 볼 때마다 심적 고통이 커 ‘탑 수술’(유방 절제술)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남성답다고 여겨지는’ 가슴을 갖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납작한 가슴을 원할 뿐이다. “여성이나 남성으로 여겨지는 모습에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제 정체성이 논바이너리라고 하면 사람들이 주로 보이는 반응은 이래요. ‘그래서 당신은 여자예요, 남자예요?’ 누구든 성별 이분법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우리 사회는 여전히 논바이너리를 성별 정체성 중 하나로 인식하지 않아요.”

유방 절제술을 받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지만 최소 800만원의 비용 마련조차 버겁다. 그래도 ‘나답게’ 살아남길 원한다. “죽기 전에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논바이너리도 법적 성별로 인정받는 날까지 최대한 오래 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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