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4일 지바현 호타초등학교 도로역. 학교 체육관을 개조해 만든 농산물 장터에서 방문객들이 쇼핑을 하고 있다. 반기웅 기자

일본 지바(千葉)현 아와(安房)군의 농촌 마을 교난(鋸南) 지역은 저출생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2000년대까지 1만명 안팎을 유지했던 인구는 6700명(2024년 8월 기준)으로 쪼그라들었다. 1888년 개교해 126년간 마을을 지킨 호타초등학교(保田小学校)도 2014년 끝내 문을 닫았다.

이듬해 12월. 마을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폐교한 호타초등학교가 1년 간 개·보수를 거쳐 다시 문을 연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도로역’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일본 도로역(道の駅·마치노에키)은 ‘안전하고 쾌적하게 도로를 이용할 수 있는 도로교통환경을 제공하고, 지역의 활력을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시설’(일본 도로역 공식홈페이지)을 뜻한다. 철도역에 빗대 만든 용어로, 한국의 도로 휴게소와 외형은 비슷하지만 역할이 다르다.

대부분 국도에 인접해 설치되는데, 지역 친환경농산물·특산품 판매를 기본으로 숙박·식사·농장체험 등 관광, 지역 커뮤니티, 지진 대피 시설 등 방재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일본 도로역, 1993년 103개→2023년 1209개

주변에 철도역이 없는 지역 주민에게는 일상의 거점이 되고 관광객에게는 지역의 관문 역할을 한다. 1993년 전국 103개소에 도로역이 개설된 이후 지난해 기준 1209개로 12배 가까이 늘었다.

폐교한 초등학교를 활용해 만든 호타초등학교 도로역. 반기웅 기자

호타초등학교 도로역은 ‘학교를 살려야 한다’는 지역 주민의 바람이 반영돼 세워졌다. 주민들이 철도역과 고속도로 나들목 인근에 위치한 학교 입지를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정부·지자체가 12억엔 가량의 지원금을 투입했다.

폐교 1년여 만에 호타초등학교는 특산품 판매·관광·방재·지역 커뮤니티 등 지역 연계 기능을 갖춘 복합 휴게소로 탈바꿈했다.

폐교, 호텔·식당·지역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

지난달 24일 찾은 호타초등학교 도로역은 여름 성수기를 맞아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교사동 1층에는 관광 종합안내소와 레스토랑, 카페가 들어섰다. 레스토랑 식사는 초등학교 ‘급식’ 메뉴를 제공했고, 카페 역시 학교 소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정해진 시간마다 학교 종소리를 울려 ‘학교’의 정취를 더했다.

2층 교실은 방문객을 위한 숙박 시설로 개조했다. 2~4인실 객실 10개를 비롯해 단체 관광객을 위한 15인실 객실도 갖췄다. 책·걸상, 칠판이 있는 교실 ‘객실’은 방문객에게 익숙하고도 새로운 공간으로 다가왔다.

학교 복도와 교실을 활용해 운영하는 호타초등학교 도로역 숙박시설.

숙박시설로 개조한 호타초등학교 교실. 반기웅 기자

이날 자녀와 함께 도로역을 찾은 주부 키쿠치(菊池·지바)는 “지난번 방문 때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과 입학 예행 연습을 위해 숙박을 했다”며 “덕분에 아이가 학교에 적응을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 체육관은 마을 주민이 수확한 농산물 직거래 장터로 쓰인다. 매대를 가득 채운 과일·채소마다 생산한 마을 주민의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유통 과정을 축소해 가격이 저렴한데다 질이 좋아 농산물 구입을 위해 도로역을 찾는 방문객도 늘고 있는 추세다.

연간 90만명 방문…관광객 유치·일자리 창출

방문객 비중은 지역 주민 10%, 외부 관광객 90% 정도로 순수 도로역 방문객만 연간 90만명에 달한다. 교난 지역 전체 방문객은 한 해 160만명 정도로 도로역 설립 이전보다 60만명 정도 증가했다. 도로역을 들렀다가 교난 지역에 머물러 관광을 즐기는 이들이 늘면서 생긴 변화다.

평소 관광·상업 시설 위주로 운영되지만 지진 등 재난이 발생하면 주민 대피 공간으로 활용한다. 위급 상황 시 주민을 수용할 수 있도록 빈 교사 공간 곳곳에 방재시설을 갖췄다. 지역 일자리도 만들어내고 있다. 호타초등학교 도로역 내 식당과 카페 등 시설에서 일하는 지역 주민은 100여명에 달한다.

호타초등학교 도로역이 성공하면서 지난해에는 폐원한 부속 유치원도 도로역 시설로 확장했다. 유치원 컨셉을 살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 공간과 함께 ‘초딩 입맛’을 겨냥한 음식점도 들어섰다. 빈 유치원 공간은 벤처 기업 사무실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공유 업무 공간을 조성했다.

지난해 호타초등학교 도로역 시설로 개조한 부속유치원. 반기웅 기자

호타초등학교 운영사 교리츠솔루션스 나카무라 야스시(中村 靖) 부소장은 “모든 사람들이 한 번은 다녔던 곳이 초등학교”라며 “그 시절 건물과 향수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학창 시절을 추억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했다.

도로역 성공 비결에 대해 그는 “지역마다 처한 문제가 다른만큼 각 지역 사정에 맞춰 도로역 테마를 정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며 “특히 지자체와의 협업은 필수기 때문에 관할 지자체와 지속적인 필요하다”고 말했다.

벤치마킹한 한국…농수산물 장터에 그쳐

일본에서 도로역이 성공적인 지역 상생모델로 안착하자 한국도 벤치마킹 했다. 2017년 충남 태안군은 남면 당암리 일대에 사업비 175억원 규모의 공익형 휴게소 ‘도로역’ 건립을 공식화하고 2019년 ‘태안 농수산물센터’를 준공했다.

하지만 태안 농수산물센터는 관광·지역 커뮤니티 등 복합 기능을 갖추지 못해 당초 공익형 도로역 건립이라는 사업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역 특산품 비파를 테마로 건립한 지바 미나미보소시의 도로역. 반기웅 기자

이호상 인천대 일본지역문화학과 교수는 “도로역의 핵심은 농수산물 직거래가 아니라 도시 사람, 이용자들이 도로역을 활발히 오가면서 지역 공동체가 재편되는 것”이라며 “태안 도로역은 농수산물 판매에만 치중하다보니 여느 농수산물 판매장과 차별성이 없는 휴게소가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자체에서 단기간 출장을 통해 일본 도로역 기능을 예단하고 겉모습을 따라 만든 결과”라며 “지역 전문가를 통해 지역 환경과 당면한 문제를 디테일하게 연구하고 전략을 짜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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