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은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이었어요. 임대업체 이사한테도 ‘정말 소중한 돈이니 저한테만큼은 사기 치면 안 된다’고 몇번이고 당부했고요. 문제가 생긴 걸 알고 정말 죽고 싶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서 더는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이아무개(41)씨는 지난해 8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오피스텔에 전세 보증금 3억원을 내고 입주했다. 깊은 상실감을 벗어나 새 공간, 새 시작을 다짐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달 뒤, 이씨 집에 내용증명이 날아들었다. 이씨와 계약한 임대업체가 건물주에게 납부해야 하는 임대료를 수개월째 연체하고 있어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니, 세입자들은 퇴거하라는 내용이었다. 각종 전세계약 주의 사항을 꼼꼼히 챙겼던만큼 “나만큼은 당하지 않을 줄 알았던”, ‘전세사기’였다.

이씨만이 아니었다. 이웃들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오피스텔이 통째로 전세사기의 제물이 됐기 때문이다. 입주민 25세대가 입은 피해 금액만 90억원이 넘는다. 세입자들은 모두 ‘전대 계약(건물을 빌린 뒤 제3자에게 한번 더 임대를 놓는 행위)’을 맺고 입주했다. ㄱ임대업체가 건물주에게 약 10년간 보증금 20억원, 월세 9500만원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건물 전체를 빌렸고, 다시 이씨와 이웃들에게 세를 놓는 식이었다.

계약 당시 모든 것이 믿을만했다고 피해자들은 말했다. 전대차 계약에서 중요한 건 ‘임대인이 임차인의 전대(재임대)에 동의했는가’다. 피해자들은 이 점을 모두 확인했다고 한다. 동의 없이 전대가 이뤄지면 건물주는 임대차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있다.

건물주는 한국건설기술인협회였다. 회원만 100만명에 육박하는 거대 협회였고, ㄱ업체가 8년 가까이 무사고로 임대를 관리하고 있다는 점도 미더웠다. 결정적으로 ‘전입신고에 따른 확정일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세입자들은 모두 전입신고를 마쳤다.

이만한 규모의 임대사업을 장기간 운영해온 임대 전문 업체가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체납하고 자취를 감출 가능성을 놓친 게 문제였다. 임대 업체가 임대료를 체납하자 건물주는 임대차 계약을 해지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전입신고를 했지만 이번 경우처럼 임대업체가 증발해버리면 도움이 안된다는 걸 세입자들은 사태가 벌어진 뒤에야 알게 됐다. 세입자(전차인)들은 임차인에게 납부했던 전세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이씨는 “한달 만에 어머니의 유산을 다 잃었다는 생각에 죄송스러워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통곡했다.

이씨의 오피스텔 이웃들도 집에 얽힌 각자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2017년부터 이 오피스텔에 산 오아무개(41·한국 이름)씨는 10년 전 한국에 온 미국인이다. 그는 “외국에서 월급의 반 이상을 월세로 지불하며 살았는데 한국의 전세 제도는 너무 신기하면서 좋은 제도라고 생각했다”며 “전문 임대업체라 오히려 개인 간 전세 거래보다도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퇴거요청을 받고서야 이 모든 걸 알게 됐다”고 황망해했다.

김아무개(35)씨는 “가지고 있던 돈 전부에 부모님 도움까지 받아 마련한 신혼집인데, (퇴거 절차 일환으로) 세입자 확인을 한다며 법원 집행관이 다른 세대의 현관문을 뜯고 들어가는 걸 목격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일반적인 임대차 계약과 달리, 전대차 계약은 임대업체와 세입자 간 계약 관계이기에 임대업체가 쏙 빠진 상황에서 건물주인 협회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이강훈 주택세입자 법률지원센터 ​세입자114 센터장(변호사)은 “임대업체 소유가 아닌 건물에 전대차 계약을 맺어 월세도 아닌 전세로 입주하는 건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ㄱ임대업체를 사기·사문서위조및행사·업무방해 혐의로, 한국건설기술인협회를 사기방조 혐의로 수사 중이다.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4일 한겨레에 “조만간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겨레는 ㄱ임대업체에 수차례 연락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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