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2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유정(27)씨가 1년5개월 전 동생이 죽어갔던 골목에 다시 섰다. 동생 고 유연주(당시 21살)씨는 2022년 10월29일 대학 기숙사 방을 함께 쓰던 동갑내기 친구 고 진세은씨와 이태원을 찾았다 함께 목숨을 잃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참사 이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 된 골목 한가운데 홀로 선 유씨는 참사를 상징하는 보라색 목도리를 하고 30분간 손으로 대자보를 써내려갔다.

“다녀왔습니다.”

유씨의 대자보는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59명의 희생자가 영원히 할 수 없는 말. 영문도 모른 채 하늘의 별이 된 제 동생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로 시작한다. 이어 유씨는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은 대통령이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외면당했다.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것도 모자라 금전 지원을 운운하며 마치 유가족들이 배·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인 양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며 “윤석열 정부는 우리 사회를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사회적 참사와 부실한 국가 정책의 피해자인 우리 청년들은 새벽을 기다리며 서로 손을 잡았다. 우리의 날갯짓은 큰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적었다. 30분간 대자보 작성을 마친 유씨는 마지막 부분에 “지겨운 절망을 넘어, 내일을 위해 투표합시다”라는 글귀를 크게 적었다.

이날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시작으로 20·30대 유권자 4명이 동세대 청년들에게 총선 투표를 호소하는 ‘릴레이 대자보’ 붙이기에 나선다. 22일에는 지난해 숨진 해병대 고 채수근 상병과 서이초등학교 순직 교사를 추모하며 해병대 예비역 대학생 신승환씨와 예비 초등교사 포포(가명)씨가, 23일에는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이철빈씨가 대자보를 붙인다. 이들은 ‘2030 유권자 네크워크’를 구성하고 동세대 청년들에게 “각자도생을 멈추고, 함께 지금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22대 총선에 투표하자”고 호소하는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유씨는 이날 이태원 참사 추모의 벽 옆에 해당 대자보를 붙이려 했으나, 벽을 관리하는 해밀톤호텔 경비원들의 제지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유씨는 “오늘 제가 작성한 대자보를 수도권 대학들에 붙일 계획”이라며 “정책과 청년들의 생활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꼭 총선이 아니더라도, 또래 청년들이 생활 전반에 있어 사회·정치에 관심을 갖고 같이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래는 유정씨가 쓴 대자보 전문.

“다녀왔습니다”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59명의 희생자들이 영원히 할 수 없는 말.

영문도 모른 채 하늘의 별이 된 제 동생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입니다.

유가족과 많은 시민들이 간절하게 바라왔던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은 대통령이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외면당했습니다. 참사의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것도 모자라 금전 지원을 운운하며 마치 유가족들이 배·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인 양 프레임을 씌우고 있습니다.

오로지 마약 수사에만 혈안이 되어 다중 인파 관리는 소홀했던 것이 참사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태원에 방문한 희생자들이 문제라며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진상규명을 바라는 우리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서울 시내 모든 길을 걸었고 온몸으로 기었습니다.

서로 잡은 연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전국을 뛰어다녔습니다.

수천, 수만 번을 외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단초가 되었고 우리의 작은 날갯짓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은 우리 사회를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더 고립된 개인주의로 몰아넣었습니다. 심지어 청년들의 입은 틀어막혔고 사지는 억압당했습니다. 국민의 죽음에는 도피와 외면, 변명만 난무했고 민생·경제·외교를 비롯한 국가 살림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부끄럼 없는 정부와 여당은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만 민생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무참히 짓밟혔으며 민주주의는 사라졌습니다.

사회적 참사와 부실한 국가 정책의 피해자인 우리 청년들은 새벽을 기다리며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비록 나의 행동은 작은 날갯짓에 불과할지 모르나 우리의 날갯짓은 큰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불공정과 비상식에 맞설 용기를 가지고 우리가 함께 행동한다면 짙고 긴 밤을 지나 반드시 기다리던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2024년 봄, 대한민국에 비로소 새벽이 오고 해가 뜨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연주의 언니 유정이 청년들에게 호소합니다.

지겨운 절망을 넘어, 내일을 위해 투표합시다.

김채운 기자 cw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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