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1운동 때 발표한 독립선언서 첫머리입니다. 3·1 독립선언서는 당시 육당 최남선이 기초했는데요. 이를 감수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문필로 이름을 떨친 위창 오세창(이하 위창)이죠. 민족 개화와 독립운동에 일생 매진했던 그는 예술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서예가로 추사 김정희의 학맥을 이어받은 대학자였죠.

간송 전형필의 스승이자 간송 컬렉션 형성에 큰 도움을 준 근대 미술계의 상징적인 인물인 위창 오세창(왼쪽에서 다섯째)과 간송(여섯째) 등이 1938년 보화각 개관일에 북단장 사랑에 자리한 모습. 간송미술문화재단

위창은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지키기 위해 문화유산 수집과 서화사 정리에 앞장섰는데요. 이 ‘문화보국(文化保國·문화로 나라를 지킨다)’ 정신은 간송 전형필(이하 간송)로 이어져 이른바 간송 컬렉션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줬죠. 그 대표적 유물은 앞서 9월 3일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요. 간송이 수집한 서화 유물의 가치와 의미를 올바르게 정립한 것은 시대를 대표하는 감식안(鑑識眼) 위창의 감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올해 위창 오세창 탄신 160주년을 맞아 간송미술관은 보화각(서울 성북구) 가을 기획전으로 ‘위창 오세창: 간송 컬렉션의 감식과 근역화휘’를 통해 그의 안목을 거친 대표적인 간송 컬렉션 총 52건 108점을 선보여요.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간송의 서재 이름이자 상징적인 수장처인 ‘취설재’‘옥정연재’를 쓴 위창의 글씨로 전시가 시작됩니다. 위창은 부친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오경석과 함께 금석과 서예 작품에 관심을 갖고 이른바 ‘천죽재(天竹齋) 컬렉션’을 형성, 일부 서화와 인장을 간송에게 증정했죠. 청나라 금석서 『금석색』에 실린 한나라 와당을 그대로 옮겨 그린 조선 말기의 화원 유숙의 ‘한와도’, 1847년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한나라 비석인 ‘봉용산비’ 탑본은 모두 오경석이 선물 받은 것으로 위창을 거쳐 간송이 수장하게 됐죠.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보화각에서 열리는 ‘위창 오세창: 간송컬렉션 감식과 근역화휘’ 1층 전시장 모습. 정명공주의 ‘화정’(왼쪽)과 남영의 ‘산수도권’이 보인다.

조선 선조와 인목왕후의 첫째 공주인 정명공주가 쓴 ‘화정’은 조선 여성이 남긴 전례 없는 서예 대작으로 ‘빛나는 정치’라는 뜻처럼 후대 국왕들과 후손들이 존경한 작품입니다. 간송이 1936~1938년 서화·골동 구입내역을 기록한 『일기대장』을 통해 위창이 수장하던 것을 1937년 옥정연재로 입수된 내력이 확인됐어요.
그 밖에 위창이 제자이자 평생의 벗으로 여긴 간송에게 증정한 44과의 인장(도장)도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위창이 직접 간송의 이명·자·호 등을 전각한 인장은 물론, 근대 미술계의 거장 안중식의 인장 13과도 포함됐는데요. 그중 10과는 위창이 우리나라 역대 인물의 인장을 모아 엮은 『근역인수』에 실린 것과 일치해 의미가 깊죠.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위창이 쓴 발문. 간송이 몇 년을 별러 많은 돈을 아끼지 않고 사들였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이 1935~1943년 직접 수집한 서화에는 위창의 감식이 담긴 발문을 함께 배치해 각 유물의 입수 경위와 수장 내력 등 숨은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어요.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의 경우 수록작 중 ‘월야밀회’‘휴가답풍’과 함께 전시된 위창의 발문에 따르면 몇 년간 많은 돈을 들여 화첩을 구입했다고 하죠.
2층 전시실에서는 위창의 서화 감식이 남긴 한국 회화사의 백미 『근역화휘』 간송 소장본 3종의 표지 14점을 비롯해 고려부터 근대까지 35인의 작품 35점을 볼 수 있습니다. 무궁화가 많은 땅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근역(槿域)’의 이름 아래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회화 작품을 엄격하게 선별해 엮은 『근역화휘』는 각각 7책·1책·3책이 전해요. 1916년 완료돼 가장 앞서는 7책본에는 총 189인 244점, 1917년 근대 서화가만 증보한 현대첩 1책본에는 32인 38점, 1920년대 엮은 천·지·인 3책본에는 50인 70점의 서화 작품이 수록된 것으로 조사됐죠.

고려 공민왕이 그린 ‘양도’. 공민왕은 글과 음악은 물론 고려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릴 만큼 그림 솜씨가 빼어났다고 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근역화휘』 책 옆에는 섬세하고 꼼꼼하게 그려진 얼룩무늬 양 그림이 걸렸는데, 오른쪽 위에 위창이 쓴 글자로 고려 제31대 공민왕의 그림 ‘양도’라는 걸 확인할 수 있죠. 이를 시작으로 신사임당의 화훼초충도를 연상시키는 여류화가 월성 김씨의 ‘서과투서’, 19세기 나비 그림에 탁월했던 이경승의 ‘부귀호접’, 근대 서화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안중식의 ‘탑원도소회’ 등을 거쳐 가장 후기에 그려진 이한복의 ‘성재수간’까지 산수·인물·영모·화훼·초충·사군자·기명절지 등 다양한 화목에서 기량을 뽐낸 서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 회화사의 시대별 경향과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어요.

‘위창 오세창: 간송컬렉션 감식과 근역화휘’ 전시에서 책의 형태로는 처음 선보이는 『근역화휘』 중 7책본. 『근역화휘』는 위창 오세창이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회화 작품을 선별해 엮은 화첩이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위창 오세창은 스승으로서 간송에 ‘문화보국’ 정신을 전하고 간송 컬렉션 형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발문·상서 등을 통해 격을 한층 더 올려주신 분”이라며 “지난봄 보화각 재개관전에 이어 간송미술관의 역사와 간송 컬렉션 형성을 재조명하는 3개년 계획의 두 번째 기획전과 탄신 160주년 기념전을 겸해 ‘위창 오세창: 간송 컬렉션의 감식과 근역화휘’를 선보이게 됐다”고 설명했죠. 이어 “『근역화휘』 내 개별 작품이 아닌 책의 형태로 엮어 공개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간송 컬렉션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서울대박물관 소장 『근역화휘』보다 앞서 제작된 것이 확인되는 등 학술 가치가 크다”고 강조했어요. 한편 1971년부터 53년간 무료로 개방해온 봄·가을 기획전이 이번부터 유료화됐는데요. 전 관장은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미술관의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해 내린 불가피한 선택에 대해 시민 여러분의 너른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최대한 부담이 되지 않게 검토해 결정한 유료화로 확보한 재원은 연구·보존 및 전시 비용에 사용해 보다 나은 운영을 하겠다”고 밝혔죠.

『근역화휘』수록작 중 하나인 조선의 여류화가 월성 김씨의 ‘서과투서’. 신사임당 이후 규방에서 전승되던 초충도 양식의 흐름과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위창 오세창: 간송 컬렉션의 감식과 근역화휘’
장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보화각
기간: 12월 1일까지
관람 시간: 화~일요일(월요일 휴관) 오전 10시~오후 6시(입장 마감 오후 5시, 인터파크티켓 온라인 예약 필수, 잔여 티켓에 한해 현장 구매 가능, 매일 오전 11시 전시+교육패키지 티켓 구매 시 교육 프로그램 참여 가능)
관람료: 일반인(19~64세) 5000원, 어린이·청소년(7~18세) 3000원, 65세 이상의 경우 현장에서 신분증 등 증빙 가능 서류 확인 후 특별권(1000원) 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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