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의 마음책방은?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새로 알게 된 것보다 잊어버리는 게 더 많기 때문에 지식 총량이 늘어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이해력이 좋아지는 건 분명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타인을 격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요. 좀더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은 삐삐언니가 책을 통해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엄청나게 좋은 책, 이라고 생각하면 리뷰를 쓰기 전에 주눅이 듭니다.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멋진 사람을 만나면 말 한마디 건네는 게 너무 힘든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 전 자전거 세계일주를 한 영국인 의사의 책이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가슴이 뛰었어요. ‘발견의 여행’(스티븐 페이브스 지음·강병철 옮김, 위고 펴냄). 내가 사랑하는 열쇳말이었어요. 다리를 움직여 먼 거리를 이동해 낯선 공간을 탐험하는 이야기. 더욱이 지금은 많은 ‘의사 선생님’들이 진료 현장을 떠나 있는 비상한 시기잖아요. 국경을 102번 넘으며 8만6209km를 달리고 돌아온 의사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당장 책을 주문했습니다.

아, 나는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러시아제 소총으로 무장한 탈레반이 도사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당연히 엄두가 나지 않고, 유럽의 주유소 주차장에 텐트를 치고 잔다는 것부터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한도가 간당간당한 마이너스 통장에 의지한 짠내 풀풀 여행이라니. 책이 너무 재밌다고 했더니, 번역가 강병철씨는 진지한 농담을 건넸습니다. “절대 따라하진 마세요,”

이렇게 대단한 책이니, ‘마음책방’ 서가에 모시기가 얼마나 어렵겠어요. 이럴 때는 대단한 글쟁이들이 용기를 줄 때가 있습니다. “주먹밥으로 말하지만 엄선한 쌀로 정성껏 지어서 적당한 힘을 주어 간결하게 꽉 쥔다. 그런 식으로 만든 주먹밥은 누가 먹어도 맛있다. 글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을 제대로 ‘쥐기’만 하면, 거기에 담겨 있는 마음은 성별이나 연령의 차를 넘어 비교적 쉬이 전해지는 게 아닐까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발견의 여행’이 ‘엄선한 쌀’임은 분명하니, 제대로 움켜쥐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생업을 접고 장기간 여행을 다녀온 누군가를 만난다면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지겠죠? 왜 떠났어? 어떤 걸 봤어? 여행 이전과 뭐가 달라졌어?

일단, 스티븐은 왜 떠난 것인가. 그는 런던의 유명한 세인트토머스병원 응급실에서 열심히, 즐겁게 일하던 의사였습니다. 의회 연단에서 갑자기 쓰러진 귀족부터 약에 찌든 노숙인까지 온갖 군상들을 만나는, 그에게 응급실은 일상의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련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전문의가 되기 직전, 어떤 갈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습니다. 그는 ‘Sehnsucht’라는 단어로 설명해요. 더 많은 것을 애타게 갈망하지만 정작 그것이 뭔지 쉽게 설명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것. “더 많은 공간,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위험, 더 많은 여행은 나를 세계와 연결해줄 것이라고 세계에 대한 나의 감각을 새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스티븐은 어떤 경험을 했을까요? 엄청난 기세로 솟아오른 땅덩어리(안데스), 지평선에 이글이글 떠오르는 태양(말레이시아 고산지대) 밤하늘 유성의 축제(우즈베키스탄) 같은 아름다운 자연은 기본입니다.

지구 곳곳에선 놀라운 환대와 친절이 베풀어지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온 백인 남성 의사’라는 지구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더러운 자전거 여행자에게 씻기고 먹이고 ‘생일파티’까지 열어주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잖아요?

2200일 가까운 자전거 여행은 이런 숫자들로 기록됩니다. “23권의 일기장, 타이어 26개, 케이블 16개, 체인 14개, 페달 12세트, 그리고 돈 한푼 내지 않고 길가에서 야영한 날이 천일”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중 천일이란 숫자를 가장 좋아한다.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신뢰할 만하며 여전히 자유를 누릴 공간이 있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의사라는 직업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지역 병원, 진료소 등을 찾아갑니다. 가장 고립된 지역 중 하나인 케냐의 투르카나, 타이 국경의 난민 진료소, 캄보디아의 수상 병원, 인도의 정신병원, 네팔의 한센인 전문 병원 등등. 이곳에선 어김없이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HIV로 고통받다 비닐봉지를 쓰고 자살을 시도한 카렌족(미얀마 소수민족) 여성, ‘저주’받은 병이라며 치료를 받지 못해 손가락·발가락을 잃은 네팔의 한센병 소녀, 심부름을 갔다가 ‘자살폭탄’이 터지며 뇌가 손상된 아프간 소년….

스티븐은 절망적인 환자와 의료진의 표정을 보면서 질병엔 고립, 빈곤, 차별, 폭력, 불평등의 사회적 맥락이 응축돼 있다는 깨달음을 뼛속 깊이 새깁니다. 그래서 뭄바이의 정신질환 환자나 런던의 정신질환자나 그들의 ‘구체적 진실’을 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환자의 다양한 걱정거리,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과 슬픔을 그들 삶의 구체적 진실과 비교해가며 더 깊게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다. 알고 보면 구체적 진실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500쪽 분량 여행 기록을 읽는 내내 ‘돌아온 이후’가 궁금해 안달이 났습니다. 그가 그 오랜 시간 페달을 밟으며 흘린 땀을 생각하면 도저히 뒷부분부터 읽을 수가 없었거든요. 예상했지만, 다시 세인트토머스병원 응급실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강인함 뿐 아니라 그의 인식의 지형과 심리적 풍경은 확연히 변했을 겁니다. 물론, 내가 여행 이전의 스티븐을 알지 못하지만, 변화는 분명해 보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22쪽에 이르는 마지막 장 ‘우리에 대해’를 모두 노트북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중 한 대목을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그것이야말로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인간적인 나쁜 습관이다. 정체성과 유형에 대해, 범주와 진단명에 대해 지나친 집착에 빠질 때 우리는 우리의 장대한 복잡성을 부정한다. 지도 위에 그려진 선에 너무나 깊이 빠져들 때는 반드시 뭔가가 나타나 우리의 집착 따위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 선들을 지워버린다. 화산재 구름, 전염병, 극단적인 기후, 이데올로기, 거짓 정보 같은 것이 거침없이 국경을 넘는 순간, 우리는 그간 편리한 허구를 너무 믿어왔음을 알고 바보가 돈 기분을 느끼며, 분리주의는 불행한 결말을 맞은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질문. 우리는 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그가 던지는 이 모든 근본적 질문들은 ‘좋은 의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응축돼 있었습니다. 스티븐의 답은 이렇습니다. “입을 닫고, 귀를 열고, 많이 알고,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의사뿐 아니라 모두에게 통할 것 같다.” 그래서 스티븐은 응급실을 찾은 낯선 환자들에게 처음 이런 말을 건넨다고 합니다.

“자, 제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스티븐처럼 6년간 자전거 세계일주를 한 의사는 희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의 물음과 답은 보편적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박한 목표입니다. 환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의사를 어떻게 길러내야 할까요. 의사들이 환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병원을 떠난 전공의 선생님들이 오늘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2000명 의대생 증원’이란 성과를 내기 위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다음 수’도 궁금합니다. 이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발견의 여행’. 부디 이 책이 발견되길.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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