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순간

박혁 지음 | 페이퍼로드 | 356쪽 | 1만9000원

1948년 제헌국회의에서 의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1948년 6월23일부터 1948년 7월12일까지 20일간 의원들은 헌법기초위원회가 보고한 헌법 초안을 심사하며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경향신문 자료.

1948년 6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약 한달 반에 이르는 시간은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회·경제의 기본틀을 결정한 시간이다.

1948년 6월1일 헌법기초위원회가 꾸려졌고, 위원회는 6월22일까지 17차례 회의를 열어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제헌국회 의원들은 초안을 놓고 20일 동안 논의에 들어갔다. 1945년 해방으로 탄생한 신생 국가를 어떠한 이념적·제도적 설계도에 따라 구축해야 할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박혁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이 쓴 <헌법의 순간>은 제헌국회 회의록을 바탕으로 당시 가장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던 조항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책이다.

논쟁은 국호를 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헌법기초위원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규정한 초안을 본회의에 보고했는데, 본회의 토론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대한민국’을 지지한 의원들은 “나라를 되찾았으니 빼앗긴 이름을 다시 써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대한민국’은 3·1혁명 후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뜻도 담고 있었다. 반면 서용길 의원은 “왜 구태여 망한 나라 이름을 다시 쓰려는지 모르겠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조국현 의원은 “되찾은 나라에서 다시 대한을 쓰는 게 뭐가 문제냐고 울분을” 토했다. 일부 의원들은 국호에 ‘대(大)’를 쓰는 것은 ‘대영제국’ ‘대일본제국’처럼 제국주의를 의미한 것이어서 불가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1897년 고종이 조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국호로 삼은 ‘대한’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과 ‘대한민국’의 ‘대’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통합을 뜻한다는 주장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확정됐다. 다만 최운교 의원은 “국호를 정하는 일은 법률가로서도, 학자로서도 능히 할 수 없는 일이요, 오직 국민으로부터 우러나는 표현이 국호가 되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헌법상 기본권 주체가 ‘인민’이냐 ‘국민’이냐를 두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인민’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백성’보다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법’도 ‘국민’ 대신 ‘인민’을 쓴다. 그럼에도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에는 ‘인민’이 등장하지 않았다. ‘인민’은 안 된다는 의원들은 “북한이 인민이라는 단어를 전매특허처럼 쓰고 있는 마당에 우리 헌법에 그걸 쓰자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한다. 이에 조봉암 의원은 “최근에 공산당 측에서 인민이란 단어를 잘 쓴다고 하여, 정당히 써야 할 단어를 일부러 기피하는 건 대단히 섭섭한 일”이라고 맞선다. 김준연 의원은 선거권과 관련해서는 ‘국민’을 사용하고, 재판을 받을 권리와 관련해서는 ‘인민’을 쓰자는 중재안을 낸다. 결국 표결에선 ‘국민’만 쓴 원안이 통과됐다. 유진오 전문위원은 “(국민은)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아주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라고 탄식했다.

애초 제헌헌법기초위원들은 대한민국의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로 하려 했다. 유진오 전문위원은 회고록에서 “국토 양단, 경제 파탄, 공산주의자들의 극렬한 파기 활동 등 생사의 문제를 산더미같이 떠안고 있는 대한민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해서 국회와 정부가 대립하여 저물도록 옥신각신했다면, 나라를 망치기에 꼭 알맞은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정작 본회의에 제출된 헌법초안에는 대통령제로 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저자는 “하루 아침에 판을 뒤집은 인물은 이승만”이라고 말한다. 홀로 권력을 독점하고 싶었던 이승만은 국회의장직을 사퇴하겠다고 위협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당시 헌법기초위원들은 여론조사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이승만이 새 정부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국민의 신망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본회의 토론에서는 “의원내각제가 정치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과 분단 상황을 극복하려면 강력한 통치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우위를 얻으면서 결국 새 정부의 정부 형태는 ‘견제받는 대통령제’로 결정된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제헌의원들의 신념은 오늘날 한국 중도좌파 정당 의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수준이다. 제헌헌법 초안에는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보장한 조항과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보장한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노동자 이익균점권이란 “임금과 별개로 기업이윤을 노동자에게도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얘기다.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헌법 초안 17조와 18조를 둘러싸고 이틀에 걸친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는 당시 헌법 초안 논의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진행된 논쟁이었다.

박기운 의원은 노동자의 경영참여권과 이익균점권은 “국민이 사느냐, 죽느냐가 이 문제에 달렸다”고 열변을 토했다. 문시환 의원은 “노동자 인권을 옹호하고, 근로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까 경영에 대해서도 돈 내는 자본주, 노동력을 내는 노동자가 같이 책임을 지고, 같이 의무를 가지는 동시에 운영에 대한 권한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진한 의원은 해방 직후 국부의 80퍼센트를 차지했던 적산(일제가 남긴 공장과 산업 기반)은 민족공동재산이라는 점, 노동자의 협조 없이 산업을 운영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노동자 경영참여와 이익분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어김없이 ‘색깔론’도 제기됐다. 이승만은 “국회에 공산당 세력이 다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언급한다. 이에 대한 지청천 의원(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의 반박이 인상적이다. “독립하자는 것의 기본이념이 무엇이냐? 잘 살자는 것인데 잘 살자면 자기의 이념을 살려서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남보다 특별한 경제체제를 만들어 세계의 모범 국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알 될 것이에요.”

표결 결과 제헌헌법에는 노동자 경영참여 조항은 빠지고 이익균점 조항만 남는다. 그러나 이 조항은 1962년 개헌 과정에서 삭제됐다.

저자는 당시 속기사가 꼼꼼하게 기록한 회의록을 토대로 의원들의 발언만이 아니라 그들의 표정과 기분, 회의장 내 분위기까지 살려냈다. 덕분에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이 생동감 있게 전달된다. 경어체를 사용한 것도 가독성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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