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달빛 필사
정문효

뾰족한 새 연필심 초저녁 초승달 같아
사각사각 달뜨는 책상 시집 한 권 펼쳐져
새벽별 초롱한 눈빛
자음모음 환해져 온다

연서보다 애틋한 어느 마음 앞에서
또랑또랑 알밤 까는 다람쥐 눈 몽당연필
시 내용 꼭 몰라도 좋아
스치는 결 더 좋은데

손안에 뭉툭한 몸 움찔움찔 궁글리는
꽁지 푸른 지우개 되돌려 맑은 길 낼까
밤새내 움켜쥐고도
갈수록 먼 길이다

◆정현순 (필명: 정문효)

정현순

조선대 문창과 졸업, 2022년 동서커피문학상 동상.

차상

아버지의 바람길
전미숙

건축학을 전공한 아들은 벽돌을 쌓고
아버지는 한사코 벽돌을 덜어낸다
적벽돌 가슴 언저리 바람이 지나도록

뻗어나간 잎맥을 차곡차곡 압축해
창 없는 옆구리 곡진 곳에 가둔 불안
바람의 지느러미를 길 따라 풀고 있다

집에도 길이 있어야 숨 쉬는 거라며
사나운 비바람 막아서지 말라고
빚어낸 빛깔과 향기 손길로 열고 있다

차하

칠 점 반
유인상

파도는 수평선을 못 넘고서 돌아오고
산능선에 걸린 달은
언월처럼 날이 서고
이내 속
스카이라인마저
국경처럼 살벌하다

창문 밖 도로 위는 숨 막히는 귀가 전쟁 생명선 옆에 끼고 강 대 강 대치 중인 도무지 비켜설 곳 없는 지금 시간 칠 점 반

이달의 심사평

이번 달의 장원으로 정문효의 ‘달빛 필사’를 뽑아들었다. 뾰족하게 새로 깎은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시를 읽고 쓰는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사각사각, 종이의 결을 스치는 연필 소리는 달을 스치는 맑은 바람이면서, 화자가 시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내면의 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음보가 조금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으나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시를 필사하며 좋은 시를 쓰고자하는 갈망을 잘 풀어낸 점이 돋보인다.

차상으로는 전미숙의 ‘아버지의 바람길’을 낙점하였다. 건축학 이론으로 집을 짓고자 하는 아들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상생을 추구하는 아버지를 “벽돌을 쌓고”와 “벽돌을 덜어낸다”로 선명하게 대비하였다. “벽돌”로 상징되는 자연과 사람과의 단절과 물질문명을 넘어 자연과 더불어 인간적인 소통의 지향을 유도하는 시적 전개가 자연스러우면서도 단단하다. 특히 각 수마다 잘 처리된 종장이 시의 완성도를 높이는 활구(活句)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차하는 유인상의 ‘칠 점 반’이다. 제목이 주는 생경함이 좀 부자연스럽기는 하나 “칠 점 반”을 7시 반 즈음으로 해석하고 나면 시가 새로워진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시간, 답답하고 풀리지 않는 도로 사정을 내면으로 잘 끌어와서 한 편의 시로 직조하였다. 둘째 수는 초·중·장을 전부 이어 놓음으로써 막힌 도로와 화자의 심리상태에 대한 시각적인 효과를 노린 것으로 생각된다. 제목을 쉽게 ‘일곱 시 반’으로 해도 좋았을 것이다. 이은영 박락균 김태영의 작품도 오래 손에 들고 있었다.

심사위원 서숙희(대표집필)·손영희

초대시조

돌탑

이승현

돌탑을 허물다 보면 들리는 무엇이 있다
돌과 돌 층간 사이 흐르는 빛의 여울
활 없이 속내를 켜는 큰 산, 먼 강물 같은
점이면 점 하나로 선이면 선 하나로
햇빛과 장대비로 덧칠하며 쌓아왔던
살아온 이력만큼만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
가슴속 말간 물로 돌탑을 풀어낼 줄 알면
돌 하나 내릴 때마다 산 하나가 다가와 앉고
바람도 탑돌이하다 듣게 되는 제 목소리

◆이승현

이승현

2003년 유심 등단, 이호우 신인문학상, 나래시조문학상, 서울시문학상 수상, 시조집 『빛 소리 그리고』 『사색의 수레바퀴』 『아내에게 바치는 연가』.

시인은 ‘돌탑’을 쌓은 후에 돌들이 탑이 되기까지 오래 견딘 시간을 짚어본다. 점과 선을 이어 반듯해진 돌을 한 층 한 층 쌓고 내린 숱한 날은 돌과의 연이 닿은 일이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나 또한 마음속 평평한 자리 탑을 쌓았지만 와르르 무너져버린 일이 허다했다. 쌓는 일만 집중했지 내리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돌의 단단함과 묵직함을 먼저 배웠어야 했다. “돌 하나 내릴 때마다 산 하나가 다가와 앉”는 것을 보는 시인의 심안이 웅숭깊기만 하다. 시장통에 가면 층층이 쌓아올린 밥상을 이고 배달하는 어머니들이 있다. 밥때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한 층 한 층 밥탑을 내려주는 일도 얼마나 무량한 일인가, “바람도 탑돌이하다” “제 목소리”를 듣는다는 돌탑은 어디쯤 가야 있을까, 시인이 돌탑을 내리는 그 언저리엔 향기로운 꽃탑이 철마다 피고 지리라.

시조시인 이태순

◆응모안내

다음 달 응모작은 8월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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