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날을 축낸다
박락균

시조

맛없이 욱여넣어 더디 간 삼십여 년
눈치가 바스러져 흔들리는 저녁들
지나간 절반의 밥은 곤두선 나의 시대
설익은 낱알들이 입안에서 걸리면
그믐밤 골라 가며 침묵을 곱씹을 때
푹 퍼져 잘 넘어가는 날들이 있었던가
일을 가득 채워 넣어 모자라던 새벽녘
이제는 두 눈 뜨고도 단잠에 드는 시간
밥맛은 별맛이 되어 어제의 나를 축낸다

◆박락균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 안양 양명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역임.

차상

2024 봄꽃 트렌드
송미아

오월의 설레임이 황무지를 품었듯이
당신을 만날 때면 분초마다 쓰는 일기
판타지 봄꽃 터지듯
그런 詩를 쓸 거야

어린 봄 양지바른 생성형 개모밀덩굴
데이터 연륜일까, 오밀조밀 닮은 저들!
딥러닝 업로드 되며
보라별이 빛나요

햇살엔 플라토닉, 비 온 날엔 로맨스 꽃잎
눈웃음 읽지도 않고 볼 때마다 날 당기며
꽃들도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에 물든다

차하

시작詩作의 시작始作
김나라

1. 피어보니 절벽
끝없는 음지
바위틈 뿌리내리고
먼 하늘 향해 섰는데

길 잃은
나비 한 마리
날아와 앉는다

2. 이슬도 옅어지는
희미한 그림자
맑은 향내 따라가
그 뺨을 어루자

노을이
내려앉은 듯
붉어진 그 얼굴

이달의 심사평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더위 속에서도 창작을 향한 열정이 담긴 작품들이 응모됐다. 보내온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심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중에 박락균의 ‘날을 축낸다’에 선자들의 시선이 머물렀다. 시조의 구성 원리에 충실함으로써 정형 미학을 잘 살린 작품으로 보았다. 특히 각 장의 종장이 자연스럽게 다음 장으로 연결되어 시적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30여년 지난 시간을 반추하면서 동시에 “단잠에 드는 시간” “밥맛은 별맛이 되어” 등이 새로 주어진 날들에 대한 암시로 읽힌다. 다만 제목을 조금 더 고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차상으로 송미아의 ‘2024 봄꽃 트렌드’를 선했다. 보내온 다른 작품들과 함께 고른 수준을 보여주어 시적 역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오는 AI 시대의 시대적 상황을 꽃에 비유했다. “햇살엔 플라토닉, 비 온 날엔 로맨스”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대인의 다양한 감성을 바탕으로 그런 시를 쓰겠다는 시인의 갈망이 잘 드러나 있다. “딥러닝” “멀티페르소나” “트렌드”라는 빈번한 외래어 시어들이 다소 생경하면서도 이 작품을 받쳐주는 또 다른 시적 유행이기도 하다.

차하로는 김나라의 ‘시작의 시작’을 선한다. 시를 쓰고자 하는 첫 마음의 두렵고 떨리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이다. 앞으로의 시작에 대한 각오와 갈망이 잘 드러나 있다. 제목에 굳이 한자를 병기하지 않았더라면 더 다양한 감상과 해석의 재미를 줄 듯하다. 금순희와 김정서의 작품에도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심사위원 서숙희·손영희(대표집필)

초대시조

아화역*
윤경희

글썽이던 걸음은 이내 역에 닿았다

연분홍빛 엄마는 기차를 따라가고

십리 길
별똥별 속에
나는 홀로 남겨져

*100여 년 운행. 2008년 폐역.
2021년 신아화역 운영 재개 

◆윤경희

2006년 유심신인문학상 등단. 시조집 『아화』, 『사막의 등을 보았다』, 『태양의 혀』, 『붉은 편지』, 『비의 시간』, 시선집 『도시 민들레』.

‘마중’과 ‘배웅’이 있는 기차역, 외딴 마을과 낯선 풍경, 길게 흐르는 강을 끌고 우리네 인생을 싣고 순간순간 그리움으로 철커덕 철컥철컥 달리는 기찻길.

해가 뉘엿뉘엿 질 때 볼 붉은 아이가 종종거리며 엄마를 기다릴 것만 같은 ‘아화역,’

울음을 참은 듯, 울음이 터질 듯, 눈앞이 까매지는 불안을 안고 엄마를 따라 기차역으로 걸어가는 발소리, 숨소리, 훅 퍼지는 엄마의 연분홍빛 향기, 불안이 더 팔딱거리는 심장도 연분홍빛, 엄마를 놓쳐버린 시인의 ‘아화역’엔 생시인 듯 아닌 듯 복사꽃이 흐드러진 것이 아닐까 상상을 해본다. 많은 이야기가 침잠해있는 ‘아화역’은 몽환적인 그림까지 겹쳐 보이며 작은 책 한 권을 압축해 놓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 외진 역에서 나도 엄마를 놓친 적이 있다. 꽃 무더기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엄마가 탄 차는 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직도 슬픔으로 꽃이 피는 꿈속에서의 일이다.

시인은 “십리 길/ 별똥별 속에” 홀로 남아 울먹이고.

나는 꽃 무더기에 발이 걸려 홀로 남아 울먹이고.

시조시인 이태순

◆응모안내

다음 달 응모작은 9월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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