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인 사촌 ‘릴리’ 만난 순간 디아스포라는 숙명이 됐다”

2024 박인환상 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정철훈 시인. 정철훈 제공

큰아버지 3명 월북 ‘아픈 가족사’
한민족 이산의 현장 체험 담아
“비애의 정서 아련한 충격” 심사평

“나를 찾으러 간 역사적 변방 여행
나를 버리는 여행이기도 했다”

2024 박인환상 시 부문 수상작인 <릴리와 들장미>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터전인 동북 3성, 극동 러시아, 카자흐스탄 알마티 지역 등을 답사하는 가운데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철훈 시인은 1997년 등단 이후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만주만리> 등 시집을 펴내며 꾸준히 디아스포라의 삶과 정서, 정체성을 담은 시들을 발표해왔다. 그의 시의 뿌리에는 분단으로 흩어진 채 만나지 못했던 시인의 가족사가 드리워져 있다.

올해 시 부문에는 12권의 시집이 후보에 올랐다. <릴리와 들장미> 외에도 한국시의 공간과 배경을 한반도 밖으로까지 넓힌 시집이 여럿 있었다. 심사위원단은 여타 시집과 <릴리와 들장미>의 차별성으로 “서정적이면서도 서사적인 기록에는 그의 아픈 가족사가 배경을 이루고 있어 그로부터 야기되는 비애의 정서가 아련한 충격을 준다”는 점을 들었다.

변방을 탐색하는 그의 문학의 시발점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해방 후 월북했던 큰아버지 가족과 상봉했던 기억을 회고했다. “나의 순례는 198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온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 월북한 세 분의 큰아버지 가운데 중부(仲父)가 난데없이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살고 있다며 서울의 아버지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였다. ‘내가 기억하는 동생이 맞는가. 누구, 누구는 살아 있는가. 누구는 죽었는가’ 주로 누군가의 생사를 묻는 이 질문들은 내게 있어 ‘떠도는 말’(소문, 소식)로 다가왔다.”

이듬해 봄, 시인은 제3국인 싱가포르에서 중부의 가족과 만났다. ‘디아스포라’ 좀 더 정확히는 ‘분단 디아스포라’가 그의 문학세계의 요체가 된 순간이었다. “이튿날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중부의 곁에 나와 두 살 터울의 혼혈 여동생 릴리가 파란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그 순간, 숙명처럼 내 몸 안으로 들어온 것은 강제된 디아스포라와 망명, 이주, 그리고 혼혈이라는 단어였고 그것은 나에게 영원히 떠도는 말이 되었다.”

정 시인은 <릴리와 들장미> 제4부에서 ‘릴리와 들장미’ ‘아홉 개의 피가 섞인 시’ 등 다수의 시를 통해 사촌 동생 릴리의 생애를 탐색하고 증언한다. 이 시들은 “소박한 낭만성이나 대상에 대한 외경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순 사라져가고 일순 또렷해지는 그녀의 존재 방식을 강렬”(유성호)하게 전하고 있다.

“알마티 시립공동묘지 입구에서/ 조화를 사 들고 오솔길을 걸어갔다/ 그 방향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릴리와 들장미’ 중)

“내 혈관에 몇 개의 피가 섞여 흐르는지 나도 몰라요/ 어머니 말로는 원래 러시아 혈통이었는데/ 카자흐, 집시, 투르크, 위구르, 아비시니야, 몽골, 키르키스,/ 그리고 아버지의 혈통인 한민족까지 모두 아홉 개의 피가 섞였다고 하더군요/ 그 밖에 내가 모르는 수십 개의 피가 섞여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아홉 개의 피가 섞인 시’ 중)

이 시집을 묶기까지 그는 여섯 번의 알마티 기행, 세 번의 연해주 기행, 그리고 두 번의 중국 동북지방 기행을 떠났다. 그에게 이들 지역은 “민족사적 디아스포라 흔적이 남아 있는 정신적 성소”였다. 고 신경림 시인은 그의 첫 시집 <살고 싶은 아침> 추천사에서 그의 시의 배경이자 기폭이 되는 여행을 두고 “범속한 여행이나 방랑과는 또 다른 순례”라고 평했다. 시뿐만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저작인 소설 <인간의 악보> <소설 김알렉산드라> 전기 <백석을 찾아서> 등도 그 순례의 산물이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그의 문학세계에서 “북방지향”의 여행이 갖는 의미를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결국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었다고 말하면 진부한 표현이 되겠죠. 하지만 나를 버리는 여행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토록 가보고자 했던 러시아, 중국 지역에 도착해보면 남아 있는 것은 폐허였고 나는 너무 늦게 도착한 여행자였을 뿐이죠. ‘팔면통’ 역전의 고장 난 시계를 보면서 역사적 변방을 찾아가는 내 여행도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끝 사랑이 있듯 끝 여행도 있는 것이죠.”

시집의 제2부 ‘실개천은 잠시 빛나는 얼굴을 보여주고’에서는 20세기 역사의 흔적들이 거칠게 무너진 폐허로 변해가는 것을 목격한 시인의 안타까움과 쓸쓸함이 배어 있다.

“한인 최초의 이주민 촌락 지신허로 들어가는 뚝방길/ 중국어로 계심하(鷄心河)로 쓰고 티진헤로 읽는 곳/ 사설 경비실이 들어서 있고 목줄에 매인 개가 날뛰며 짖었다/ (…) 개 짖는 소리에 묻히는 한인 이주사/ 이제 지신허도 밟지 못하는 땅이 되었다”(‘실개천은 잠시 빛나는 얼굴을 보여주고’ 중)

“톱니바퀴가 멈추기 전까지 사력을 다했지만/ 고장 난 시계처럼 쓸쓸한 외형만 남아 있는 역/ 처마에 매달린 낙수가 노인의 눈물처럼/ 눈물의 순도처럼 툭, 하고 떨어졌다”(‘고장 난 시계’ 중)

오랫동안 북방으로 간 이주자들의 행로를 좇으며 “이주자가 된 것 같은 동류의식에 사로잡히곤” 했던 그는 자신을 “심정적 이민자”라고 표현한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세계의 국경이 허물어진 21세기에 디아스포라 혹은 이민자들의 고통스럽고 애잔한 심정을 포착한 시가 얼마나 읽힐지 의문이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없는 시대의 디아스포라는 여전히 인류의 삶 속에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한국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급증하는 후기 디아스포라 시대에 이들의 애환과 심상을 문학예술로 포착하고 표현하려는 누군가에게 이 시집이 작은 참고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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