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양혜규: 윤년’

영국 첫 대규모 서베이 전시

20년에 걸친 120점 작품 총망라

가전제품·블라인드부터 세계 무속 전통까지

양혜규 “나쁘지 않다” 쿨한 반응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양혜규의 개인전 ‘양혜규: 윤년’에 전시된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전시 모습. 헤이워드 갤러리 제공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양혜규: 윤년’ 전시 전경. 헤이워드 갤러리 제공

런던 템즈강 남단 워털루 다리를 건너면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 벽에 걸린 털이 부숭부숭 돋은 짚으로 만든 원색의 조형물 사진을 볼 수 있다. 양혜규의 개인전 ‘윤년(Leap Year)’이 열리고 있는 헤이워드 갤러리다. 영국에서 열리는 양혜규의 첫 대규모 서베이 전시(작가의 예술 세계를 조사·연구하는 전시)로,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작품 120여점이 미술관의 5개 전시관을 꽉 채운다.

양혜규는 ‘세계 100대 작가’(독일 캐피탈 선정)에 한국 작가로 유일하게 포함될 만큼 세계적인 작가다. 하지만 난해하고 현학적인 면모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양혜규라는 세계에 접속하기 위해선 특별한 의식이나 주문이 도움이 될 것이다. 헤이워드 갤러리 전시장 입구에 커튼처럼 드리운 파란색과 은색 방울을 통과하는 것은 20년을 횡단하는 양혜규의 예술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적절한 의식처럼 보인다. 방울의 묵직한 금속성과 대조되는 경쾌한 ‘찰그랑’ 소리를 들으며 전시장에 들어서면 양혜규의 세계가 펼쳐진다.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양혜규: 윤년’ 전시 모습. 헤이워드 갤러리 제공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양혜규: 윤년’ 전시 모습. 이영경 기자

이 세계는 생각보다 낯설거나 어렵지 않다. 빨랫대와 전구, 블라인드, 싱크대, 라디에이터에 이르기까지 친숙한 일상의 사물과 가전제품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빨래건조대에 걸린 전구가 빛을 발하고 블라인드에 구슬이 화려하게 달렸다. 천장에서 길게 드리워진 신작 ‘소리나는 동아줄’은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따왔다. 일상적인 사물을 낯설게 배치·혼합하고, 전통과 현대를 횡단하며 다양한 층위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9일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만난 융 마 수석 큐레이터는 “전시된 작품들은 시기적으로도, 재료에서도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다. 다양한 층위를 지닌 양혜규의 작품을 잘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양혜규의 이름을 국제무대에 각인시킨 작품 ‘창고 피스’(2004), 외할머니가 살던 인천의 폐가에서 연 국내 첫 전시 ‘사동 30번지’(2006)를 새롭게 구현한 작품부터 작곡가 윤이상의 ‘이중협주곡’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2024)까지 양혜규의 작품 세계가 총망라됐다.

‘창고 피스’는 양혜규가 런던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을 당시, 유럽 여러 지역에서 열린 전시가 끝나고 자신에게 돌아온 작품을 보관할 장소가 없어 작품을 박스채 쌓아올려 만든 작품이다. 총 27개의 작품과 맥주박스, 플라스틱 간이의자 등이 받침대 위에 층층이 쌓여있다. 박스에 든 작품은 일주일에 하나씩 해포(작품의 포장을 푼다는 뜻)돼 전시된다. 융 마 큐레이터는 “작가의 현실적 고민을 해결해준 작품인 동시에 개념적으로 작가의 삶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양혜규: 윤년’에 전시된 ‘창고 피스’ 전시 모습. 이영경 기자

작가로서의 출발점이 된 작품들을 소환하며 30년에 가까운 작품세계를 조망한 전시에 대한 양혜규의 소회는 ‘쿨’하다. 이날 갤러리에서 만난 양혜규는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 창작이 다시 풀지 못하는 복합적인 옷감을 짜내는 일이라면, 전시는 그 옷감을 입기 편한 옷으로 재단하는 일”이라고 말했는데, 이번엔 옷을 만드는 일을 재단사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그는 “작품과 전시는 다르다. 전시의 소유권을 이제 기관·큐레이터와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이 지금의 나의 성숙도인 것 같다”며 “작가의 인사이트와 비전으로만 끌고가는 시기를 정리하고 소유권을 양도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만족한다”고 말했다.

블라인드, 빨래건조대 등 일상 사물을 이용한 작품들이 ‘기성품’을 활용했다면, 세계 각국의 민속 신앙에 나오는 동물 등을 인공 짚으로 엮은 ‘중간 유형’ 시리즈는 수공예로 섬세하게 직조된 노동집약적 작품들이다. 한지 등으로 섬세하게 작업한 ‘황홀망’은 또한 다양한 민속적·무속적 전통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양혜규는 무속·민속을 향한 관심에 대해 “주류권력에 길들여지지 않고 포섭되지 않은 부분들이 가진 생생한 힘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하는데서 나오는 작업”이라며 자신의 작업을 인류학자에 빗댔다.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양혜규: 윤년’에 전시된 ‘중간 유형’ 시리즈들. 이영경 기자

최근 인공지능(AI)와 3D프린팅 등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 늘어나는 가운데, 수공예라는 노동집약적 형태의 작업 방식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선 “AI나 3D프린팅이 기계화·자동화라고생각하는데 거기에는 상당한 오류가 있다. 3D프린팅을 할 때도 끊임없이 오류가 발생하는데 재부팅하고 처리하는 과정이 노동집약적인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말한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이라이트는 대형 블라인드 설치작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다. 갈수록 상승하는 형태로 사선모양으로 배치된 블라인드 작품의 배경에 윤이상의 ‘이중 협주곡’이 연주된다. 음악에 맞춰 조명이 움직이며 시청각이 어우러진 공간을 연출한다. 분단 상황 속에서 독일로 망명한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아픔과 분단과 분리, 만남과 화합을 표현한 작품이다.

현지 언론의 평은 엇갈렸다. 가디언은 “우리가 상점에 갈 때 경험하는 혼란과 재미를 넘어서는 것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며 별 5개 중 1개를 주며 혹평했다. 텔레그래프는 “기발하고 매혹적”이라고 별4개를 줬다. 양혜규는 언론의 평에 대해서도 ‘쿨’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가디언의 기사를 공유하며 “브라보!”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였다. 양혜규는 “제게 그 정도 자신감은 있다. 비평은 다양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1월5일까지.

양혜규 작가.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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