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10음절짜리 행 14개(4-4-4-2 구조)가 규칙적 라임(각운)과 함께 움직이는 정형시다. 총 154편 중 빼어난 것을 고르고, 동시대적 사운드를 입혀 새로 번역하면서,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그런 때를 대비해야겠지, 그런 때가 온다면 말야,
그대가 내 결손에 눈살 찌푸리는 걸 내가 볼 때,
그때는 그대가 제 사랑의 최대 잔액 뽑아본 다음
숙고한 동기들로 사랑의 회계 결산에 임하는 때.
그런 때를 대비해야겠지, 그대 서먹하게 지나가며
태양처럼 빛나는 눈으로 인사도 건네지 않는 때,
그때는 제 한때의 상태로부터 떠나와 버린 사랑이
날 대하는 확고한 심각함의 이유를 찾으려 하는 때.
그런 때를 대비하기 위해 나를 여기 보호 중이야.
내 분수를 잘 알고 있는 상태 안에 내가 머물도록,
그리고 나 자신에 반대하면서 손들어 증언해야지
그대 쪽의 합법적 논거들이 옹호될 수 있도록.
그대가 가련한 나를 떠나는 건 법도 힘 보탤 일
그대가 날 사랑해야 할 이유 나도 댈 수 없으니.
소네트 49 (신형철 옮김)

김지윤 기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10음절짜리 행 14개(4-4-4-2 구조)가 규칙적 라임(각운)과 함께 움직이는 정형시다. 총 154편 중 빼어난 것을 고르고, 동시대적 사운드를 입혀 새로 번역하면서,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소네트 49는 셰익스피어가 쓴 ‘진달래꽃’(김소월)이다. 나를 보는 게 역겨워서 가겠다면, 원망도 눈물도 없이, 꽃길을 만들어 보내겠다는 그 시 말이다. 소월이 아직 오지 않은 이별을 굳이 가정하면서 그때 자신이 취할 태도를 시뮬레이션했던 것은, 진부한 발상이지만, 그런 의연한 태도가 제 사랑을 완성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붙들면’ 버려지는 게 되지만, ‘보내면’ 헤어지는 게 된다. 이별을 당하는 게 아니라 작별을 수행하는 일. 이런 것이라면 굴욕적이지도, 심지어 수동적이지도 않다.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사건 속에, 내 의지가 작동할 아주 작은 틈이나마 만들어, 그로써 제 존엄을 확보하는 일이다.

사랑의 회계 결산 이별 연습

셰익스피어도 아직 오지 않은 이별을 미리 그린다. “그런 때를 대비해야겠지”라고 풀어 옮긴 “against that time”이 세 개의 4행연(quatrain)을 매번 이끌면서, 상상이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진다. 이 상상은 소월의 그것보다 더 서사적이고 구체적이며 심지어 피학적이다. ‘그대’는 냉정하게도 우리 관계를 대상으로 “회계 결산”을 할 것이고, ‘나’에게 “결손”이 있어 이 관계를 계속 ‘경영’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 후로 ‘그대’는 거리에서 ‘나’를 만나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고, 그 외면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만 생각할 것이다. 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셰익스피어가 소월보다 여러모로 가혹하다고 했지만, 상상만 그런 게 아니라 대비의 수준 역시 그렇다. 잡지 않고 보내겠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날’을 대비해 화자는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한다. 자기는 중요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혹여 자신들의 이별이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면 자기는 오히려 상대편의 증인이 되겠다고, 즉 ‘그대’가 ‘나’를 떠나는 일이 지극히 합법적인 선택임을 증언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두 줄은 거의 말문이 막힐 정도의 자기 객관화를 실천한다. 나는 그대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내가 봐도 그런데 어떻게 떠나는 그대를 잡을 수 있느냐는 것.

“당신이 숭배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일의 곤란함은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 당신이 결코 진정으로 그걸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에 붙인 논평에서 돈 패터슨은 이렇게 말하며 화자의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고 했다. 덕분에 생각난 것은, 오래전에 읽은, 재기 넘치던 청년기 알랭 드 보통의 이런 질문이다.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질문은 미국의 희극인 그루초 막스(Grucho Marx)가 한 농담을 패러디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주는 클럽엔 가입할 생각이 없다.’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도 문제

보통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사람을(그루초 막스의 이름을 따서) ‘Marxist’라고 불러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이념의 신봉자들과 의도적으로 헷갈리게 만든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다니 이건 말도 안 돼’라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나 따위를 사랑하다니, 그렇다면 그는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해!’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흥미를 잃고 연애를 포기하는 경우라면 이는 ‘신경증’이라고 진단할 만한 게 맞을 것이다. 보통은 해당 챕터 말미에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합당한 충고를 남겨두고 있다. 소네트 49에는 그 균형이 깨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시에 ‘자기 혐오’만 있지는 않다고 나는 주장한다. 시 말미의 “가련한 나”(poor me)라는 표현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연민은 자기 사랑이다. 여기서 이 시는 다시 ‘진달래꽃’과 만난다. ‘진달래꽃’의 화자가 (그게 ‘사랑의 완성’과 ‘존엄의 획득’을 위한 노래라고는 하나) 굳이 미리 그런 노래를 부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상상까지 하는 내가 가련하지도 않은가, 그러니 떠날 생각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역효과를 낳는다는 게 문제다. 상대방에게 더 큰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죄책감을 예습시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시인이 부른 것은 이별을 재촉하는 노래일지도 모른다.

Against that time, if ever that time come,
When I shall see thee frown on my defects,
When as thy love hath cast his utmost sum,
Called to that audit by advis’d respects;
Against that time when thou shalt strangely pass,
And scarcely greet me with that sun, thine eye,
When love, converted from the thing it was,
Shall reasons find of settled gravity;
Against that time do I ensconce me here,
Within the knowledge of mine own desert,
And this my hand, against my self uprear,
To guard the lawful reasons on thy part:
To leave poor me thou hast the strength of laws,
Since why to love I can allege no cause.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쓰며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역사』 『몰락의 에티카』 등을 썼다. 2022년 가을부터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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