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리아스》 2 -

역사 속의 트로이전쟁

트로이전쟁은 신화 속의 전쟁으로 오랫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1870년에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이 트로이전쟁 유적지를 찾아냈다고 발표했습니다. 역사적인 고고학적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인리히 슐리만이 주장한 곳은 트로이전쟁이 일어나기 천몇백 년 이전 지층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정작 그 지층 위에 묻혀 있었던 트로이 성벽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20세기 들어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 트로이전쟁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지층을 밝혀냈습니다.

어쨌든 이를 통해 트로이전쟁이 호메로스의 상상이 만들어낸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전쟁의 발발 원인, 경과 그리고 그 규모나 기간까지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트로이 지역에서 그리스와 트로이 간에 무력 충돌이 벌어진 흔적이 발견되었을 뿐이고,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역사 속 트로이전쟁의 실체를 함께 상상해볼까 합니다.

먼저 전쟁의 발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호메로스가 말한 것처럼 트로이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했기 때문일까요?

트로이전쟁이 발발한 시점은 지층 분석의 결과로 기원전 1250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이때는 후기청동기 시대가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동시에 소아시아 지역 트로이 동쪽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히타이트가 철제 무기로 무장하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철기 시대가 막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가 교체되는 시대적 배경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청동기 시대 미케네 문명을 꽃피웠던 그리스는 에게해 건너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날아오는 새로운 문명, 히타이트 철기 문명의 향을 맡기 시작합니다. 그 향이 몹시 궁금했고 탐났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 국력으로 볼 때 그리스가 소아시아 지역을 원정하거나 히타이트를 정복할 엄두를 낼 형편은 못되었습니다. 히타이트는 이미 독자적인 제철 기술을 발전시켜 철제무기로 무장하여 주변국을 휩쓸고 있는 동방의 대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토가 아나톨리아 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거쳐 이집트 바빌론까지 뻗쳤고, 동으로는 오늘날 이라크 영토인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까지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가 히타이트의 철기 문명과 교류할 수 있는 길은 에게해를 배로 건너다니는 방법과 그리스 반도 북쪽 끝으로 올라가서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다니는 방법뿐이었습니다. 어느 방법이든 당시로서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문명을 교류할 수 있는 루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와 히타이트

그때 에게해 건너편 트로이 성이 그리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트로이 성은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에 버티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동서 간 문명 교류의 고리와 같은 요지였습니다. 더욱이 트로이 성은 강대국 히타이트의 본토가 아니라 위성국 트로이 영역이라는 점도 그들에게 솔깃했을 겁니다. 이 성을 점령하여 교두보로 삼으면 히타이트의 철기 문명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는 트로이 성을 호시탐탐 노리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다시 <일리아스>의 저자 호메로스의 주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그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는 바람에 트로이전쟁이 발발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호메로스만의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한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도 ‘납치당한 그리스 여자 한 명’이 트로이전쟁의 발발 원인이라고 기술했습니다. 역사 기술에 있어 거의 결벽주의자에 가까웠던 헤로도토스가 그렇게 기록했다면 적어도 당시 그러한 이야기가 구전되어온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래서 그가 역사에 그렇게 기록을 남겼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에 유목민족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납치혼이 횡행했습니다. 전쟁에서든 아니면 습격해서든 다른 민족의 결혼 적령기 여성을 납치해와 아내로 삼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납치혼 때문에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가 전쟁을 벌였다고 하기엔 좀 구차합니다. 그것도 10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우기기에는 좀 과합니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그 ‘납치당한 그리스 여자 한 명’이 다름 아닌 스파르타의 왕비이고, 그녀의 남편인 메넬라오스는 그리스의 맹주 미케네 왕 아가멤논의 동생이라고 사건을 키웠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앞서 소개한 대로 그리스의 필요에 따라 헬레네 납치 사건은 단지 ‘울고 싶은데 뺨 때린 사건’으로 그리스가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호메로스는 트로이전쟁을 그리스와 트로이, 마치 동서의 대표 선수들이 맞붙은 시대를 상징하는 전쟁으로, 양국의 내로라하는 영웅들이 총출동하고 거기에 신들까지 다 나서 개입한 동서 세계대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그 전쟁의 배경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는 당대 최강국 히타이트와 맞짱뜨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소위 핀셋식 전쟁을 선택했습니다. 그리스도 당시 아프리카 전통 강자인 이집트가 히타이트에 맥없이 무너졌다는 소식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한 곳도 트로이 성이었습니다. 사실 트로이는 동방의 대표 선수가 아니었고, 히타이트의 위성국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트로이전쟁이 앞서 살펴본 대로 그 성격상 10년씩이나 계속되면서 둘 중 하나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그리스와 트로이가 맞붙을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엄격히 말해 전쟁 동기와 당시 국력으로 볼 때 트로이전쟁은 그리스 입장에서 소아시아 지역에 대한 노크 성격의 전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찔러서 발 뻗을 여지가 생기면 교두보로 차지할 테고, 그렇지 못하면 한 차례 약탈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트로이 고토에서 화염의 흔적과 트로이 성 복구의 지층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하니, 한 차례 원정으로 공성전이 벌어져 트로이 성이 함락되고 그리스의 약탈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딱 그 정도 전쟁이 아니었을까요?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교체되는 시기에 우연히 두 동서 문명이 빗맞은 일회성 마찰이 아니었을까요? 쌍방이 서로 잦은 약탈과 납치혼이 반복되다 한 차례 비정규전이 아니라 정규전이 벌어진 정도? 그리스도 트로이 성을 가까스로 함락했지만, 결국 교두보로 확보하지는 못하고 약탈에 그쳐야 했고, 트로이는 성이 함락당하고 화염에 휩싸였지만, 그리스가 떠난 후 다시 성을 재건하며 너덜해진 왕조를 추슬러야 했던 전쟁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가디언, 2022)

 

최봉수 칼럼니스트

최봉수

김영사 편집장
중앙 M&B 전략기획실장
웅진씽크빅 대표이사
메가스터디 대표이사
프린스턴 리뷰 아시아 총괄대표

주요 저서 <출판기획의 테크닉>(1997), <인사이트>(2013),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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