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박병규 기자] 2019년 7월 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새로 생겼다. 법 시행 이후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꾸준히 늘어나, 지난 해 10,028건으로 역대 최다 신고 건수를 기록했다.(출처: 고용노동부,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사건 처리 현황 2023.12.)
그렇다면 이 법이 생겨난 후 노동자들은 ‘덜 괴로운’ 현실 속에 살게 되었을까? 이 법은 매일 일터로 향하는 이들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보호하고 있을까?
■ 법이 놓치고 있는 ‘사각지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법이 보호하는 울타리 밖에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남겨져 있다.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등. 이들에겐 법이 적용되지 않아 그들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자동차 부품을 다루는 조그만 회사에 입사한 지 1년여. 故 전영진 씨(27)는 직장 상사의 괴롭힘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입사 당시 ‘좋은 사람들이 모인 회사에 들어간 우리 아들이 인복은 많다’고 생각했던 고인의 어머니. 하지만 그로부터 1년여 뒤 어머니가 발견한 건 고인의 휴대전화 속 녹음된 상사의 충격적인 폭언과 욕설, 심지어 폭행의 정황이 담긴 통화 녹음 파일 700여 개였다.
법원은 가해자인 故 전영진의 상사에게 협박 폭행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하고 판결문엔 ‘직장 내 괴롭힘의 극단적인 사례’라고 썼다. 법원으로부터 ‘극단적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았음에도 고인은 5인 미만 사업장에 다녔다는 이유로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 경우 사업주는 피해자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할 책임이나 신속히 사건을 조사할 책임 등을 지지 않는다. 책임이 없으니 처벌도 없다.
이처럼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330여만 명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생기기 전의 시대를 살고 있다.
■ 신고조차 어려운, 갈수록 교묘해지는 직장 내 괴롭힘
인천의 한 사회복지 사단법인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했던 노형석(가명) 씨. 자신이 입사한 사회복지 사단법인 일이 아니라 법인 이사장이 운영하는 다른 영리기업의 일을 도와야 했다고 한다.
종교활동 참석과 헌금, 십일조를 강요당하고 이사장 어머니의 팔순 잔치에도 가 고기를 굽고 노래를 부르는 등 업무 외 일을 해야 했던 직원들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고 실토한다.
그러나 그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지 못했다. 그가 이사장에게 당한 행위를 섣불리 신고하지 못하고 그 대신 퇴직이라는 선택지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틈, ’셀프 조사‘
19년 동안 한 공공기관에서 일해온 권 부장(가명). 첫 직장이었던 이곳에서 그는 2년 연속 전국 표창장을 받고, 자신이 이끌던 부서를 전국 1등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새로 부임한 이사장에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노동청에 신고하였으나, 우선 '사내 조사'를 실시한 후에 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괴롭힘 행위자가 사용자인 경우 '근로감독관 직접 조사'만이 원칙이었던 고용노동부의 처리지침이 2022년 사업장 내 자체 조사 지도·지시를 병행하는 것으로 개정되었기 때문.
권 씨는 기관 대표인 이사장이 가해자로 지목된 상황에서 사내 조사를 실시한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동부 지침대로 사내 조사를 받았고, 조사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은 '불인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고용노동부에서 다시 진행한 조사 결과, 괴롭힘 '인정'을 통보받은 권 씨. 판정위원회 7인 만장일치 결과였다. 가해자로 신고된 이사장은 과태료 500만 원을 통보받을 예정이다.
“셀프 조사를 병행하도록 한 게 나쁜 개정이라든지 의도가 있는 개정이라 보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문제는 현장에서 가뜩이나 적은 수의 과로하고 있는 근로감독관들이 그 내용에 혹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사용자의 조사 결과에 따라가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죠.” -윤지영 변호사 / 직장갑질119 대표 변호사 인터뷰 中 -
■ 직장 내 괴롭힘, 우리는 피해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병동에서 근무했던 5년 차 간호사 故 이하나 씨(30). 직속 상사가 자신의 뒤에서 자신의 가정사에 대한 험담을 하고 앞에선 견디기 힘든 폭언을 해 힘들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병원 측에 최초 신고한 이후에도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웠다는 내용도 유서에 수차례 적었다.
'추적 60분'의 취재 요청에 응한 해당 병원은 괴롭힘 사실을 신고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 극단적 선택을 한 고인에 대해 “평소에도 매우 밝은 모습으로 근무했기에 갑작스러운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러울 뿐”이라고 대답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괴롭힘에 대한 기준과 감수성. 우리 사회는 괴로워하는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직장 내 괴롭힘 근절을 위한 열쇠라고 말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5년. 5년 간 우리의 직장은 덜 괴로워졌나. 여전히 존재하는 법의 사각지대와 현실과 괴리된 지침 그리고 그 끝에 놓인 피해자들의 눈물.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기고 간 숙제를 '추적 60분'이 하나씩 풀어나간다.
'추적 60분' 1367회 「갑질의 왕국 - 지금 우리 회사는」 편은 24일 오후 10시 KBS 1TV에서 방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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