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야치

흔히 두보는 시성(詩聖), 왕희지(王羲之, 303-361)는 서성(書聖)으로 칭해진다. 둘 다 으뜸에 대한 찬사다. 문득 궁금해진다. 왕희지의 서예는 어느 정도의 뛰어난 경지에 이른 것일까.

이번 사자성어는 가계야치(家鷄野雉)다. 앞의 두 글자 ‘가계’는 ‘집에서 키우는 닭’이란 뜻이다. ‘야치’는 ‘들판이나 산에 서식하는 꿩’이란 뜻이다. 본래 ‘염가계(厭家鷄), 애야치(愛野雉)’, 이 6글자에서 동사가 탈락되고 차츰 4글자로 정착됐다. 따라서 ‘가계야치’는 ‘집안의 닭은 홀대하고, 들판의 꿩을 좋아한다’라는 의미다. 이미 누리고 있거나 가진 것을 가벼이 여기고, 타인의 무언가를 부러워하거나 탐내는 심리를 꼬집는 상황에서 주로 쓰인다. 서예 분야에서 가히 최고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받는 왕희지와 관련된 한 일화에도 이 4글자가 등장한다.

왕희지는 평생 전혀 궁핍하지 않았다. 왕희지 가문은 동진(東晉, 317-420) 왕조 수립에 큰 공(功)이 있었다. 쟁쟁한 공신 가문 출신이라는 이 배경은 그가 관료로 진출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서예에 꾸준히 집중하여 마침내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는 든든한 경제적 배경이었다.

왕희지의 첫 스승은 여류 명필 위(衛)부인이었다. 미망인이었던 위부인은 과묵한 아동 왕희지에게 정갈한 서예의 기초를 확실히 다져주었다. 성년기가 되자, 왕희지는 첫 스승 위부인을 떠나 각지를 유람하며, 스승없이 홀로 서예 학습을 계속했다. 특히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비문(碑文)을 통해 자신의 서예 안목을 키웠다.

왕희지는 살아생전에 이미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당대 중국의 대부분 지식인이 왕희지의 글자를 수집하기 위해 경쟁했다. 글씨를 처음 접하는 학동들도 그의 필체를 모사하며 학습할 정도였다. 하루는 장수(將帥) 유익(庾翼)이 자기 집안의 자손들이 왕희지의 글씨를 구해 학습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가계야치’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가족들에게서 느낀 서운한 감정을 지인에게 털어놓았다. 왕희지가 일찌감치 관직을 사직하고 서예에 몰두했기에 자신보다 조금 더 이름이 알려졌을 뿐이라고 치부하던 중이었다. 여전히 중국 전역에서 유익 자신의 서법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기도 하던 터라 더 마음이 상했다.

그럼 왕희지의 집안 자손들은 누구의 필체를 주로 학습했을까. 왕희지의 부인은 서예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 왕희지의 필체와 다른 모방 필체를 알아볼 정도의 눈은 갖고 있었다. 왕희지와 그녀 사이엔 왕헌지(王獻之)라는 총명한 아들이 있었다.

학동 시절의 왕헌지가 하루는 실수로 점획(點劃) 하나를 빠뜨려 ‘태(太)’를 ‘대(大)’로 잘못 적었다. 이를 발견한 왕희지가 가운데에 점을 찍어 ‘태’로 수정해 주고는 ‘모친께도 보여주라’고 말했다. 모친이 왕헌지에게 말한다. “기특하다, 내 아들. 세 항아리 물을 쓸 정도로 연습하더니 그래도 이젠 네가 ‘태’의 ‘점’ 하나는 아버지와 비슷해졌구나”. 모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만, 그가 부친의 필체를 그리 열심히 연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일으키는 대목이다.

성년이 된 이후, 왕헌지 역시 부친의 대(代)를 이어 차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그는 부친 왕희지에게 반듯한 해서(楷書)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초서(草書)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자주 조언했다. 만년에 왕희지는 반듯한 해서(楷書)와 흘림체 초서(草書), 그리고 그 중간 형태인 행서(行書), 이 ‘삼체(三體)’ 모두에서 높은 경지의 작품 세계에 도달했다.

최근까지 이어지는 한·중·일 3국의 서구 문화 과잉 모방도 필시 ‘가계야치’의 한 연장선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또한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타고난 본능 가운데 하나다. ‘더 나은 것’과 ‘더 새로운 것’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낳은 지극히 보편적인 문화 현상일 수 있다.

이 본능 덕에 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하지만 때론 호기심의 깊이도 중요하다. 한 예로, 우리 고유문화 가운데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는 ‘새로운 것’이 적지 않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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