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쫄쫄이’였다. 7년 전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내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까지 나를 “쫄쫄이”라고 불렀다. 뒤에 관용구처럼 따라오는 문장은 이것이었다. “맨날 ‘한번만 업어줘, 한번만 업어줘’라고 하더니 언제 이렇게 컸다냐.” ‘쫄쫄이’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엄마만 졸졸졸 따라다니는 나를 두고 할아버지가 붙인 별명이었다.

고모들이나 삼촌의 말을 들어보면, 나는 엄마를 무진장 사랑했던 모양이다. 내가 2~3살이던 무렵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의 화장실은 외양간 옆에 있는 ‘푸세식’이었는데, 엄마가 화장실에 가면 나는 그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엄마가 나오길 기다렸다고 한다. 마루를 내려와 신발을 신고 마당을 가로질러야 화장실에 닿을 수 있는 번거로움에 더해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어린 딸 때문에 엄마는 급한 용변 처리도 쉽지 않았다.

나의 ‘쫄쫄이’가 된 엄마

엄마가 고모들에게 날 맡겨두고 시장에라도 가면 나는 숨이 넘어가도록 울어서 까무러친 적도 두어번 있다고 했다. 안으려고 하면 울고불고하며 발버둥을 쳐, 첫 조카인 난 고모들에게 “별나디별난 애”였을 뿐 별다른 귀염을 받진 못했다. 최근 여동생네 둘째 딸이 입만 열면 “엄마”(여동생)를 찾아대는 탓에 통 쉬지 못하는 동생을 보곤, 엄마는 “쟤가 그렇게 제 엄마를 힘들게 한다”고 속상해했다. “어렸을 때 나 같아?”라며 너스레를 떠는 내게 엄마는 “네가 더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를 유독 ‘졸졸졸’ 따라다녔던 나는 4남매 중에서도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았다. 발가락 길이 차이가 거의 없는 뭉툭한 발 모양이나, 짧은 장딴지 정도가 엄마와 ‘닮은꼴’이라고 그동안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얼굴에서 엄마 얼굴이 보였다. 엄마가 아픈 뒤로 의식적으로 찍어두는 엄마와의 사진 속엔 웃을 때 팔(八)자로 휘어지는 눈썹, 입을 다물고 웃을 때 아랫입술을 내미는 버릇, 팔을 한쪽 관자놀이에 괴는 자세 등이 비슷했다.

엄마와 닮아서일까. 나는 때때로 엄마와 영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오늘 저녁엔 미역국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놨다든지, 엄마가 암에 걸리기 두달 전 내가 이명에 걸렸다든지 하는 아주 사소하지만 세세한 부분이 통할 때다. 게다가 엄마는 나의 ‘지시대명사 화법’을 유일하게 알아듣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엄마 그거 어디 있지?”라고 물으면, 엄마는 리모컨, 손톱깎이, 면봉 등 뭐가 됐든 바로 찾아냈다.

엄마를 닮고, 엄마를 졸졸졸 쫓아다니던 ‘쫄쫄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독립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다. 엄마와 노는 것보다 밖에서 노는 게 좋아졌고, 엄마만을 좇던 시선은 친구·애인 등으로 향하며 다양한 관계에서 ‘경우의 수’를 만들었다. 엄마가 덜 늙고 건강할 때까지는 ‘모녀’간의 애정 관계가 느슨해져도 괜찮았다. 엄마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맛집 탐방을 하기도 했으니까.

우리가 커가면서 한번 바뀌었던 이 관계는, 엄마가 나이 들고 암에 걸리면서 또 한번 역전됐다. 엄마는 나의, 그리고 우리의 ‘쫄쫄이’가 됐다. 육체적·심리적으로도 약해진 엄마는 혼자 있는 걸 두려워했다. 이는 주변의 다른 환자들과도 비교됐다. 엄마가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같은 병실에서 가족이 보호자로 함께 입원한 환자는 엄마뿐이었다. 엄마 맞은편에 입원한 환자는 홀로 이식 전후를 모두 견뎠으며, 대각선 침대를 썼던 환자도 무균실에서만 딸과 함께한다고 했다. 주변 친구나 동료들을 둘러봐도 암에 걸린 부모님이 진료를 받을 때마다 매번 함께 병원을 찾는 이는 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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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다니실 때 여행도 가길”

엄마는 나를 일주일에 두세 차례 보는데도, 내가 집으로 갈 땐 명절에만 자식을 보는 사람처럼 아쉬워했다. 휴일에 엄마 집에서 낮잠을 청할 땐 한 침대에서 자자고 하기도 했다. 엄마는 암 진료와 무관한 안과·정형외과·한의원 진료에도 우리가 동행하길 원했다. 특히, 전업주부인 동생은 일주일에 5차례 정도 엄마한테 불려 갔다. 어떤 날은 무릎이 아파서, 어떤 날은 눈꺼풀이 이상해서, 또 어떤 날은 바람을 쐬고 싶어서, 장을 봐야 해서, 뼈해장국이 먹고 싶어서, 엄마의 이유는 많았다.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을 하고 엄마는 점차 안정됐다. 병원에서 다발골수종을 진단하는 기초검사인 혈액·소변 검사에서 검출된 엠(M)단백 수치가 0이라고 했다. 진료 간격은 2주, 한달, 두달, 석달까지 점차 늘어났다. 담당의는 다발골수종은 완치가 없고 재발 확률이 80~90%라고 했지만 진료 간격이 길어질수록 나는 긴장이 풀어졌다. 조금씩 ‘귀찮다’는 마음이 피어오르고 꾀가 났다. 때때로 야근한다고 말하고 쉬거나 친구와의 저녁 약속을 업무상 미팅이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회사 일은 어찌 됐든 ‘면죄부’가 됐다. 상황을 모르는 엄마는 “피곤해서 어쩌냐”고 걱정했다.

긴장이 풀어질 만하면, 엄마는 한달에 한번꼴로 감기에 걸렸다. 폐렴까지 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감기는 초장에 잡아야 했다. ‘1차 병원에서 코로나19·독감 검사를 먼저 하고 음성일 땐, 1차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는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암 진료를 받는 병원을 찾는다’가 로직이었다. 감기로만 병원을 여러 차례 가게 되자, 나는 엄마한테 “그러니까 조카들 만날 때 마스크 꼭 쓰라고 했잖아” “애들 감기 걸렸는데 왜 만났어”라며 힐난에 가까운 잔소리를 했다. 진짜 엄마가 걱정돼서인지, 엄마가 감기에 걸리면 내가 귀찮아질까 봐서인지 나조차도 불분명했다. 걱정을 가장해 ‘착한 딸 코스프레’ 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혈액 속 암 수치가 조금씩 올랐다. 췌장에선 종양이 발견됐다. 의대 증원 이슈로 의사들이 병원을 이탈하고 있어 자칫 대응이 늦어질까 봐 마음이 초조했다. 다행히 양성종양 같다며 6개월 뒤 다시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해보자는 의사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엄마를 전담해 맡았던 여동생의 막내딸 언어 발달이 느렸다. 동생이 엄마 신경 쓰느라, 딸 신경을 못 쓴 탓은 아닐까. 그즈음부터 나는 가족돌봄휴직을 고민했다. 특히 암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는 남편이 나를 설득했다. 최대한 나중을 위해 휴직 기회를 남겨두려는 내게 “시간이 지나 환자의 상태가 많이 나빠진 상황에서는 휴직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장모님이 걸어 다니시고, 대화가 될 때 휴직해서 같이 여행도 다니라”는 조언이었다. 무급휴직이어서 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인데, 진심으로 이를 추천하는 그가 고마웠다.

앞으로 나는 3개월 동안 엄마와 시간을 보낸다. 간병일기는 마치고 엄마와 대화하며 ‘엄마의 자서전’을 만들 계획이다. 엄마의 사진과 조카들이 그린 그림, 서로에게 쓴 편지를 담아 우리끼리 돌려볼 참이다. 두서없이 그리고 주어·목적어 생략하고 말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화내지 않고 듣는 게, 나의 첫번째 숙제다.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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