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 갈무리. 사진=MBC뉴스 유튜브

“폴레트 나르달, 흑인 페미니즘과 네그리튀드(negritude·흑인성) 문학 운동의 선구자입니다.”(KBS) “루이스 미셸, 교사·작가·무정부주의자 운동가이고 페미니스트입니다.”(MBC) “시몬 베유, 아마 프랑스 여성 중에 가장 유명한데… 낙태법, 낙태 비범죄화 법안을… 낙태 합법화를 통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SBS)

2024 파리 올림픽의 개막식의 한 장면. 센강 어귀를 10인의 여성들 금빛 동상이 수놓는다. 프랑스어로 ‘sororité’, 우리말로 ‘여성 연대’를 뜻한다는 이 7분 남짓한 섹션은 한국의 지상파 방송 3사에서 단위 시간당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등장한 장면일테다. 프랑스를 빛낸 10명의 여성들을 소개하는데 ‘페미니스트’ 말고는 달리 설명할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에는 이를 두고 일종의 해방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후기가 올라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는 낙인의 용어였다. 과거 올림픽은 한국의 ‘페미’가 작동하는 방식을 만방에 고한 계기였다.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의 자리에 오른 안산 선수를 향한 공격을 두고 외신들은 ‘온라인 학대(online abuse)’로 명명한 반면, 국내 언론들은 ‘페미 논란’, ‘젠더 갈등’으로 다뤘다. 이후 ‘페미’라는 단어는 언론에서 여성들을 향한 일련의 백래시(backlash‧반동)를 ‘논란’으로 변주하는 데 익히 사용되면서 극심하게 오염됐다.

실제 현장의 기자들은 ‘페미니즘’을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젠더’나 ‘여성주의’ 같은 단어로 대체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류란, ‘성평등 보도의 개념화와 실천’ 논문) 사회적으로 조장된 ‘페미’가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기사의 본래 메시지가 채 전달되기도 전에 불필요한 편견을 유발할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지상파 3사에서 페미니스트 여성들을 기리는 타국의 올림픽 개막식을 중계해야 하는 상황이 여성들에게 주는 쾌감은 전복적이었다. ‘Feminist Activist’로 적힌 영어 자막이 고스란히 ‘페미니스트 운동가’로 읽히는 것과 함께.

최초로 남녀 동수 참가를 이뤄낸, ‘성평등 올림픽’의 개막식 무드를 망치는 것은 다름 아닌 한국 방송사의 무성의한 자막이었다. SBS는 여성들로 이뤄진 정부를 상상한 저작 ‘여인들의 도시’를 쓴 작가 크리스틴 드 피장(1364~1430)을 소개하며, 자막에 ‘유럽 최초의 여류 작가’라고 썼다. 나는 순간 눈을 비볐다. 한 세대 이전 백과사전에나 나올 법한 단어, ‘여류’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 갈무리. 사진=SBS뉴스 유튜브

‘여류(女流)’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이르는 말’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매우 제한적이던 시절, 남성을 전문 직종의 기본값으로 놓고 여성을 변방으로 밀어내는데 사용됐던 용어다. 과거 기사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를 소개할 때 남성을 기본값으로 놓고 여성에만 ‘이슬기(여)씨’라고 덧붙이던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에 나온 ‘여류 작가’의 동의어는 ‘규수 작가’다. 반례로 ‘남류 작가’란 없으며, ‘규수’라는 말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를 감안하면 ‘여류’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여류’로 검색되는 기사만도 최근 일주일 새 30건을 훌쩍 넘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언어 사용에 예민해야 할 언론이, 구습을 버리는 데 둔감한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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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 이후 이어지는 보도에는 기혼 유자녀 여성에게만 꼭 따라붙는 ‘엄마 선수’ 등의 명명도 그대로 답습됐다. 사격 여자 10m 공기권총의 김예지, 혼성 10m 공기소총의 금지현 선수가 나란히 은메달을 목에 걸자 ‘엄마 총잡이’, ‘MZ 엄마’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이들 선수들이 거둔 성과는 운동 선수에게도 예외는 아닌, 여성들이 흔히 겪는 경력 단절의 어려움을 딛고 이뤄낸 쾌거다. 그러나 기혼 유자녀 남성에게는 ‘아빠 선수’라는 타이틀을 붙이거나 육아의 고충을 묻지 않으면서, 여성들에게만 줄곧 ‘엄마 선수’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재생산하는 행태다. 언론이 되물어야 할 것은 세계적인 기량의 선수들도 피해갈 수 없는 한국 여성들의 ‘경력 단절’ 실태이지, 이 또한 노력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희망 찬가’가 아닐 것이다.

실제 페미니스트인 기자들도, ‘페미니즘’이 가진 어감을 고려해 ‘젠더’나 ‘여성주의’ 같은 단어로 우회하려는 모습을 현장에서 많이 봤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또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페미니즘’ 하는 순간 상대가 얼굴을 돌리는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어휘가 ‘온라인 학대’에 의해 오염됐다면, 거기에 맞서 바로 잡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지 ‘우회’가 답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언론에서 ‘페미니즘’을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의 본뜻을 잃는 데에, ‘페미’를 ‘논란’으로만 소비함으로써 한몫했던 잘못을 되새기는 차원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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