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76조의 2·3)’이 시행됐다. 한국 직장인 3명 중 1명이 경험하고, 한 해 최소 1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괴롭힘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의식이 커지면서다. 법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고 금지하기 시작했다.

법 시행 후 5년이 지났다. 괴롭힘 금지법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제기된다. 긍정적인 쪽은 법으로 인해 괴롭힘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조직문화가 개선됐다고 본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직장인들의 괴롭힘 경험률은 과거보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최근에는 경영계 등을 중심으로 비판적 의견도 나온다. 괴롭힘 정의가 모호해 현장에서 갈등이 커지고 허위신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괴롭힘 판단기준을 명확히 하겠다고 밝혔다. 괴롭힘 성립 요건에 ‘지속성’과 ‘반복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제안이 정부에 접수됐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논쟁은 괴롭힘을 ‘개인 대 개인’의 문제에 가둔다. 괴롭힘 행위의 의도나 신고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따져 묻는 것은 조직의 구조적 문제를 가린다. “노동자들 사이 갈등이 커지고 있다”는 프레임이 떠오를수록 기업과 국가의 책임이 흐릿해지는 것이다. 현행법도 ‘일터 안전’의 관점을 충실히 담지 못하고 있다.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산업안전으로서의 괴롭힘 문제’에 주목해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제정에 일조한 담당자를 국내 언론 최초로 인터뷰했다. 괴롭힘을 일터 안전의 문제로 보는 국제적 흐름에서 한국 사회는 어디까지 와 있는지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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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기 1달 전인 2019년 6월, 국제노동기구(ILO) 총회는 ‘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190호 협약)’을 채택했다. 직장 내 폭력·괴롭힘을 금지한 최초의 국제 협약이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44개국이 협약을 비준했다.

190호 협약의 가장 큰 특징은 괴롭힘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일터 안전(산업안전보건)’의 관점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협약은 정부가 폭력·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하고, 관련 정책과 근로감독 등 점검·조사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정한다. 협약 담당자인 발렌티나 베기니 ILO 담당관은 이렇게 말했다. “폭력·괴롭힘은 단독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분위기에 의해 촉진된다. 괴롭힘은 조직·사회의 관점에서 대응해야 한다.”

190호 협약은 괴롭힘 금지법 시행 5주년을 맞는 한국 사회에 여러 시사점을 준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괴롭힘을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괴롭힘 신고자는 ‘조직에 분란을 일으킨다’는 눈총을 받는다. 사건 발생 후 조사는 ‘누가 더 잘못했느냐’를 따지는 데 집중할 뿐, 조직문화 등 괴롭힘의 근본 원인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사용자의 부실 조사, 신고 후 불리한 처우 등도 심각하다.

괴롭힘은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업무로 맺어진 관계에서 발생한다. 괴롭힘이 산업재해와 맞닿는 지점이다. 산업재해 예방·후속조치를 촘촘히 수립하는 것처럼, 괴롭힘도 ‘일터 안전’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달 23일 협약 담당자인 베기니 담당관을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와 강은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가 다리 역할을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발렌티나 베기니 국제노동기구(ILO) 담당관. SNS 갈무리

- ILO는 왜 190호 협약을 제정했나.

“ILO는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을 통해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며 ‘모든 인간은 자유와 존엄성, 경제적 안정과 기회균등의 조건에서 물질적 안녕과 정신적 발전을 모두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일터 폭력·괴롭힘은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위협이며, 기회의 평등을 거부하고 경제적 불안을 영속화한다. 2019년 ILO는 190호 협약을 채택함으로써 필라델피아 선언의 야망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 직장 내 폭력·괴롭힘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진단했나. 어떤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나.

“폭력·괴롭힘은 복잡하고 다면적인 현상이다. 고정관념과 차별, 해로운 사회적·문화적·성별 규범, 조직 문화, 열악한 인적 자원 관리 및 심리사회적 위험도 폭력과 괴롭힘의 위험을 키우는 요소다.

폭력·괴롭힘을 예방하고 근절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일자리’와 ‘불평등 해소’에 기반하는 구조적인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2022년 ILO의 조사 결과는 ‘폭력·괴롭힘은 단독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분위기에 의해 촉진된다’고 지적한다.”

- ILO 협약은 폭력·괴롭힘을 산업안전보건의 관점에서 보도록 한다. 이런 관점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효과가 있나.

“일터 폭력·괴롭힘은 직장 내 평등을 훼손하고, 업무상 관계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생산성을 저하시켜 기업에 피해를 준다. 피해자에게는 상당한 건강·경제적·직업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사회적으로는 임금 격차, 여성의 노동 참여 격차, 성별임금격차 등 이미 존재하는 사회경제적 성별 격차를 악화시킬 수 있다.

190호 협약의 혁신적인 지점은 산업안전보건과 평등을 하나의 조약에 통합한 것이다. 두 개념은 일터에서의 기본 원칙이자 권리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폭력과 괴롭힘은 개인적(주관적) 요인과 집단적(직장·조직) 요인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산업안전보건은 ‘예방’에 초점을 맞추며 ‘작업 환경’과 ‘집단’에 집중한다. 이는 (산업안전보건이) 일터 폭력·괴롭힘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도구를 잘 갖추고 있고 구조적·체계적 대응을 제공하며, 직장 구성원들을 동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상호 권리와 의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괴롭힘 관련 조치의) 이행을 촉진할 수도 있다.

고용주는 노동자들 및 노동자대표와 협의해 폭력·괴롭힘에 관한 정책을 채택해 시행해야 하고, 산업안전보건 관리 시 폭력·괴롭힘 및 이와 관련된 심리사회적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노동자와 그 대표가 참여해 폭력·괴롭힘의 위험성을 평가하고 관련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하며, 적절한 방식으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노동자는 고용주의 정책을 존중하고 폭력과 괴롭힘을 삼갈 의무가 있다.”

2019년 6월21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기구(ILO) 제108차 총회에 참석한 노·사·정 대표자들이 ‘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190호 협약)’을 체결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ILO 제공

-산업안전보건의 관점에서 괴롭힘 방지 대책을 세운 국가의 사례를 알 수 있나.

“덴마크의 ‘근로환경법’에는 일터 폭력·괴롭힘에 대한 포괄적 접근과 심리사회적 위험이 명시돼 있다. ‘안전하고 건강한 신체적·심리사회적 작업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법안의 주요 목표다. 법안은 ‘공격적인 행동(폭력·괴롭힘, krænkende handlinger)’을 “회사 내 다른 사람을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기타 불명예적인(degarding) 행동에 심각하게 또는 여러 번 노출시키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고용주는 작업장의 건강 및 안전 조건에 대한 위험성 평가를 준비하고 전체 과정에 걸쳐 직원을 참여시켜야 한다.”

-한국도 괴롭힘 금지법 시행 5년째를 맞았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 직장인들이 신고를 망설이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의 10%만 실제 신고를 했다. 신고하지 못한 이유로는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54%)’ ‘신고에 대한 보복이 우려돼서(33%)’ 등이 꼽혔다. 해외는 어떤가.

“2022년 ILO는 로이드선급재단·갤럽과 함께 폭력 및 괴롭힘 경험에 대한 최초의 국제 조사를 진행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중 절반만이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했으며, 한 가지 이상의 폭력과 괴롭힘을 겪은 후에야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공개를 하지 않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시간 낭비일 것’과 ‘평판 하락의 두려움’이었다.

190호 협약은 고소인과 피해자, 증인, 내부고발자에 대한 모든 형태의 피해 또는 보복을 방지한다. 점점 더 많은 국가에서 이런 보호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도입했다. 보복 조치로부터의 보호는 분쟁 해결의 기본이다.”

서울 중구의 한 횡단보도에서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베기니 담당관에게 한국의 괴롭힘 금지법을 둘러싼 논쟁들에 관련된 의견을 물었다. 베기니 담당관은 “ILO 협약·권고 적용 전문가위원회(CEACR)의 의견 없이 개별 국가의 법·제도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없다”면서도, 190호 협약의 기준에서 봤을 때 일반론적으로 가능한 답변을 했다.

- 최근 한국에서는 괴롭힘의 구성 요건으로 ‘지속·반복성’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일회성이라도 괴롭힘으로 인정되는 행위(폭력·성희롱 등)’와 ‘지속·반복돼야 괴롭힘으로 인정되는 행위(승진 차별, 업무 몰아주기 등)’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요건을 두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190호 협약은 폭력·괴롭힘을 “일회적이든 반복적이든 신체적, 정신적, 성적 또는 경제적 피해를 목표로 하거나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용납할 수 없는 일련의 행동과 관행, 또는 이에 대한 위협”으로 정의한다. 위 조항은 ‘일련의(range)’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새로 나타나는 다양한 폭력·괴롭힘 유형을 다루기 위해서다. 또 폭력·괴롭힘이 독립적인 행동이나 여러 행동의 총합, 점차 악화되는 행동 등 다양한 행위를 포괄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협약에 따르면) 일회적이든 반복적이든 결국 폭력·괴롭힘 행위의 판단 기준은 ‘신체적, 정신적, 성적 또는 경제적 피해를 목표로 하거나 초래할 가능성이 있거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 이 있는 행위’인지 여부다. 190호 협약은 이 같은 개념을 제안하지만, 개별 비준국이 법·규정에 따라 190호 협약을 존중하면서 각자 개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 위의 주장에 찬성하는 측은 ‘허위신고’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일부 신고자들이 인사·금전 등 사적 이익을 챙기려고 허위신고를 한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허위 신고를 하는 개인을 제재하는 조항을 포함하는 국가가 늘어나고 있다. 시스템이 남용되거나 오용되지 않도록 하려면 인식 제고와 효과적인 분쟁 해결 메커니즘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A씨가 2022년 10월3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 중 ‘직장갑질이 만연한 한국사회에 던지고 싶은 말’을 써서 들고 있다. 조해람 기자

- 한국의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반면 190호 협약은 ‘일의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력과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본다. 협약 비준국들은 어떤가.

“190호 협약은 공식·비공식 경제나 민간·공공부문 모두에서 계약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일하는 사람(Worker)’에 대한 보호를 보장한다. 최근 각국은 계약 상태에 관계없이 폭력과 괴롭힘으로부터의 보호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노동법을 개정하고 있다. 190호 협약은 각국이 유연하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할 뿐, 구체적인 특정 조치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한국은 아직 190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이 이 협약을 비준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나.

“190호 협약을 비준한다면 폭력·괴롭힘을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줄 수 있고 모든 노동자, 특히 노동시장 내 약자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하려는 헌신을 보여줄 수 있다. 190호 협약은 국내 법제도와 맞물리면서 (괴롭힘에 대한) 명확성을 제공할 수도 있다.

정부와 경영계, 노동계, 시민사회는 190호 협약 비준과 이행에 협력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직위나 상황에 관계없이 폭력·괴롭힘이 없는 노동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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