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12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43개 언론, 시민단체들이 광복절 '기적의 시작' 방영 결정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KBS가 광복절 당일 이승만 전 대통령 미화 논란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편성하면서 이를 철회하라는 언론·시민단체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단체 연대회의,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사월혁명회,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등 43개 언론·시민단체들이 12일 서울 여의도 KBS본부 회의실에서 KBS에 ‘기적의 시작’ 방영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박민 KBS 사장 앞으로 서한을 전달했다.

이들은 KBS가 광복절 ‘독립영화관’에서 방영할 ‘기적의 시작’에 대해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친일파·독재자란 평가 없이 ‘건국의 아버지’로 규정 △4·19혁명, 제주4·3, 여순사건 등 국가적으로 정립된 역사 부정 △3·15부정선거나 4·19혁명을 아랫사람 책임으로 돌리며 박 대통령 하야를 ‘위대한 결단’으로 표현 △주장을 입증하는 사료나 학계 권위자 입장 등 논증 없음 등을 비판했다.

‘기적의 시작’ 구매가 ‘윗선’ 지시로 추진된 과정에 외압 가능성도 제기됐다. 박상현 KBS본부장은 사측이 올해 1월 이승만 전 대통령 이야기를 다룬 ‘건국전쟁’ 및 ‘기적의 시작’을 3·1절 특집 프로그램으로 추진하라 지시했고, 3월 TV조선의 ‘건국전쟁’ 계약이 확인되자, 본격적으로 ‘기적의 시작’에 초점을 맞추라는 업무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수개월간 실무진 우려가 이어지자 KBS 편성국장이 직접 영화 구매 서류를 올렸고, 임원인 편성본부장이 방송용 영상 편집에 나섰다고 했다. 사측은 이에 대한 KBS PD협회의 TV편성위원회, KBS본부의 공정방송위원회 개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KBS본부 중앙위원인 김문식 PD는 “직접 (‘기적의 시작’ 구매) 기안을 했다는 국장의 경우 실무진과 대화를 나누면서 ‘기적의 시작’을 방영하는 것에 대해 자기도 우려가 상당히 크다, 우려 사항이 많다, 그래서 몇 차례 의견을 윗선에 전달했다고 말한 적 있다”며 “그렇지만 편성 책임자인 편성본부장이 다 책임진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취지로 실무진이 지시에 따르도록 종용을 했던 경우가 있다”고 부연했다.

▲2024년 8월12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43개 언론, 시민단체들이 광복절 '기적의 시작' 방영 결정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실무진은 KBS본부를 통해 “‘기적의 시작’ 방영을 둘러싼 문제로 담당 팀장이 타 부서로 발령 나고 저를 포함한 3명의 실무진이 간부진과 커다란 갈등 상태에 놓여 부서는 엉망이 되어버린 상황”이라며 “간부진도 ‘기적의 시작’ 방영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압력으로 인해 방영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한다. 만약 ‘기적의 시작’이 이대로 방영된다면 외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방송되는 상황을 맞이할 거고,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전했다.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은 “‘역사 왜곡 포르노’를 공영방송을 활용해 방송하겠다는 것은 박민 사장 체제가 주도해 ‘방송 사고’를 내겠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공영방송이 다룰 수 있다. 이 논쟁적 인물을 다루는 일을 왜 ‘대통령의 술친구’라는 박민 사장이 KBS 구성원에게 맡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좋겠다”며 “정상적으로 훈련 받고 제작·방송 활동을 해왔던 방송 노동자들이라면, 상식을 갖춘 국민이라면 이승만이란 인물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때 결과물이 도저히 이렇게 나올 수 없기 때문”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홍석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은 “제가 1960년 이승만 독재 정권 물러가라고 시청 앞에 있었던 사람이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이승만은 독재자”라며 “새삼스럽게 다시 이승만을 논의한다는 게 시대적 상황으로서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백경진 제주4·3범국민위원회 이사장은 “이승만의 큰 과 중 하나는 일제 청산을 가로막아 민족정기를 쇄신하는 기회를 박탈했다는 것이다. 반민특위법을 무력화해 해산시키고 일제 경찰을 그대로 채용한 역사의 죄인”이라고 했다.

장현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의장은 “우리가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를 이야기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학살이 우리 역사에서 이뤄졌다.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은 4·19의거에 물러난 다음 바로 망명을 가다 보니 관련된 일체의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헌법에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돼 있다”며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시기 시작되고 국가 이름, 연호, 헌법과 태극기 비롯한 국가 상징물을 고스란히 이어온 사실을 밝힌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번 다큐 논란은 “개인 방송도 유튜버도 아닌 공영방송이 헌법적 질서와 법규, 규범을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 했다.

김수정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는 “KBS가 이걸 틀고 나면 다른 방송사들도 트는 것의 위험을 경감해 느끼지 않을까라는 우려까지 생기는 것 같다”면서 “간부진이 직접 나서 편집, 후속 작업을 하는 것은 유례 없는 일이고, 제작 자율성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안”이라 강조했다.

▲2024년 8월12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43개 언론, 시민단체들이 광복절 '기적의 시작' 방영 결정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2024년 8월12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43개 언론, 시민단체들이 광복절 '기적의 시작' 방영 결정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기자회견 현장을 지켜본 시민사회 관계자들이 KBS 구성원들의 적극적 대응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은 “13년 전에도 똑같이 KBS가 이승만 5부작, 백선엽 3부작을 했다”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했던 사람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등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들 모시고 생생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고 했다.

한종수 작가는 “(‘기적의 시작’ 방영 시) 논란이 돼서 KBS 시청률이 떨어질 것”이라며 “뉴미디어들이 엄청 올라온 상황에서 제 주위 분들은 KBS나 MBC 어차피 사양산업이라 그러는 분들도 있다. 극단적 표현이지만 본인들 밥줄을 위해서라도 정말 잘 싸워주시길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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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자회견을 마친 이들은 KBS 사장실 등이 위치한 본관 앞으로 이동해 결의문을 낭독한 뒤 ‘기적의 시작’ 방영 철회를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런 경우 통상 KBS 시청자센터장이 대신 받았던 것과 달리, 노사협력팀장이 나와 서한을 대신 받아갔다.

앞서 KBS 사측은 “‘기적의 시작’ 관련해서 KBS 편성본부에서는 독립적인 편성권에 의해 방송 편성을 결정하였고, 광복절을 맞아 다양성 차원에서 해당 다큐 영화를 선정, 방송하게 됐음을 알려드린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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