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21일 서울 성북구 성북경찰서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공의 면회를 마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구속된 전공의와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입은 전공의들 모두 정부가 만든 피해자다."
지난 21일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이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이른바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작성·유포한 혐의로 전날 구속된 사직 전공의 정모씨를 면회한 뒤였다. 임 회장은 "지금 유치장에 있어야 할 자들은 전공의가 아니라 용산의 간신들"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날, 다른 의사단체들도 비슷한 취지의 성명서를 앞다퉈 내놨다. 서울시의사회는 블랙리스트 작성을 두고 "전공의 사직 금지 등 정부의 초법적 조치에 대한 저항 수단"이라 주장했다. 전라북도의사회는 "개인적인 의견 표출을 이유로 구속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를 명백히 침해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도의사회는 전공의 구속을 "북한 수준의 인권 유린"이라며 규탄하는 집회도 열었다.

반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동료들을 괴롭힌 행위에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구속된 정씨는 집단사직에 동참하지 않은 전공의 800여명 등을 '감사한 의사'라 비꼬며, 이름 등 개인 신상이 담긴 명단을 만들어 온라인에 퍼뜨린 혐의를 받는다. 신상이 공개된 이들 중에는 대인기피증을 호소할 정도로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도 있다. 의료계 내부에 피해자가 있는데, 가해자를 '피해자'라고 두둔하는 목소리만 크게 울려 퍼지는 셈이다.

법원의 구속 판단은 보는 시각에 따라 과하게 느껴질 수 있다. 임 회장 말대로 정부가 의정갈등을 증폭시킨 측면도 있다. 하지만 집단행동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타인을 조리돌림 대상으로 삼은 건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실제로 수련병원에 복귀하고 싶어도 공격받을까 두려워 복귀하지 못하는 전공의들이 적지 않다. 기자의 취재 요청에 어렵사리 응했던 한 사직 전공의는 "전문의 자격을 꼭 따고 싶어 수련을 마쳐야 하지만, 개인행동을 하기 부담스러워 돌아갈 수 없다"고 털어놨다.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의대생의 신상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를 유포한 사직 전공의 정모씨가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의료계는 전공의 집단사직이 누군가 주도한 '파업'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라고 줄곧 강조해왔다. 이런 선택에 따른 사직이 용인돼야 하는 만큼, 병원에 남아 환자를 보는 전공의들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복귀자 명단을 만들어 자유로운 선택을 억압하고, 이런 행위를 여태껏 방치해온 게 현실이다. 병원에 복귀한 전공의들의 신상과 사진을 올리며 조롱하는 온라인 게시물은 의료공백 사태 초기부터 의사 전용 커뮤니티에 넘쳐났다. 그리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엔 일부 이용자가 '국민이 더 죽어도 된다'는 식의 막말을 하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의료계는 블랙리스트 작성·유포가 '일부 극단적인 전공의들의 행위'라며 억울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부 목소리를 걸러내는 자정 작용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의협이 지난 10일 공개한 블랙리스트 관련 성명서에서 유감을 표하면서도 "명단을 작성한 회원들의 절박함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사족을 붙인 게 대표적이다.

그러는 사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거나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들은 늘고 있다.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블랙리스트 관련 경찰 조사를 받은 45명 중 32명이 검찰에 송치됐다. 이 중 30명이 의사였다.

블랙리스트도 문제지만, 묵묵히 근무하는 의사에 대한 공격을 용인하는 분위기는 의사 집단에 대한 국민 반감을 키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의료계가 내놓는 정부 정책을 향한 타당한 비판마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블랙리스트 작성에 대해 "의사 집단을 범죄자 집단으로 여겨지게 할 뿐"(강희경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대위원장)이라며 자제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큰 반향은 없는 편이다. 이런 지적이 사태 초반부터 제기되고 지지를 얻었다면, 지금과 같은 전공의 구속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 수 있다. 의료계는 이제라도 가해자를 피해자라 감싸 안는 대신, 피해자를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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