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1060-70 구상회화전’

최근 5년간 기증작품 전시…이건희 컬렉션 104점

사실주의적 회화부터 입체파·야수파 영향 작품까지

지난 22일 오전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관람객들이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에 전시된 김인승 ‘붉은 원피스의 여인’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상이 진보의 동의어로, 구상이 퇴보로 여겨지던 시기에도 끝가지 구상회화를 놓지 않았던 화가들이 있었다. ‘상상력이나 개성이 부족한 미술’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람, 풍경과 일상을 고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개성 있게 표현한 작가들 중에는 백자와 꽃을 부드러운 손길로 그려냈던 도상봉부터 너무나도 유명한 박수근·장욱진,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최애’였던 문학진도 포함된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 1960~70년대 구상회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몇주 전까지만 해도 기하학적 추상회화로 가득했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이번엔 친근한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로 채워졌다.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들은 기증품이라는 점을 공유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는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는 최근 5년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 가운데 1960~70년대 구상회화를 그린 작가 33명의 그림 150여 점을 선보인다. 이중 104점이 이건희 컬렉션이다.

지난 22일 오전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어린이 관람객이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에 전시된 도상봉 ‘국화’를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주의부터 입체파까지…이토록 다양한 구상회화

“나도 야수파처럼, 아니면 표현파처럼 멋들어지게 쓱싹쓱싹 휘갈겨 그리고 싶기는 하지만 역시 그림이라는 건 반듯해야 하고 질서가 있고 너무 지나치게 원색으로 과열되지 않는 색 면을 지닌 화풍이 내 분수에도 맞고 우리 한국 미술의 장래를 위해서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더군.”(이종우)

1958년 덕수궁 고목 아래 모인 이종우, 도상봉, 이병규 등이 주축이 돼 만든 ‘목우회’는 한국 구상회화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전시 1부에선 밀도 있는 사실적 표현으로 아카데믹한 화풍을 선보였던 목우회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선보인다.

전시를 처음 여는 그림은 이병규(1901~1974)의 초록빛 작품들이다. 이병규는 이번 전시 준비 과정에서 재발견된 작가다. 양정학교 미술교사였던 이병규는 학교 온실을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나무와 꽃을 관찰하고 묘사한 ‘온실’ 연작을 선보였다. 이병규는 자신의 눈에 비친 다양한 초록빛을 인상주의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지난 22일 오전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어린이 관람객들이 ‘MMCA 기증작품전: 1960-1970년대 구상회화’에 전시된 이병규 ‘자화상’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상봉 ‘백일홍’, 1970, 캔버스에 유화 물감, 24.7×33.5cm, 이건희컬렉션

도상봉(1902~1977)의 정물화와 풍경화도 함께 볼 수 있다. 고아한 백자에 꽂힌 만개한 국화, 백일홍을 잔잔한 붓질로 은은하게 표현한 도상봉의 정물화는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다. 도상봉은 꽃의 아름다움에서 이상미를 찾았고, 꽃 그림이 사람의 감성을 부드럽게 만들고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설경’은 주택가에 내린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정물화의 정갈함과 차분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인물화로 유명한 김인승(1910~2001)의 ‘붉은 원피스의 여인’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강렬한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 옆에 놓인 백자 달항아리가 대비와 조화를 이룬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와 세련된 차림새의 여인은 1960년대 상류층 여성상을 보여준다.

노동 현장으로서의 어촌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김형구(1922~2015), 김춘식(1947~), 강정영(1947~2003)의 어촌 풍경은 노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냈다.

박수근 ‘농악’, 1960년대,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1.5×96.7cm, 이건희컬렉션

윤중식 ‘금붕어와 비둘기’, 1979, 캔버스에 유화 물감, 61×72.8cm, 유족(윤대경) 기증

윤중식 ‘평화’, 1980, 캔버스에 유화 물감, 130.5×97.5cm, 유족(윤대경)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부에선 야수파,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내면적이고 표현적인 구상을 선보였던 작가들의 개성넘치는 작품을 볼 수 있다. 박수근(1914~1965)이 농악을 소재로 그린 7점 가운데 가장 대작인 ‘농악’은 거칠고 두터운 마티에르를 강조해 인물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암각화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인물들의 동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저마다 천착한 소재에 따라 ‘○○의 화가’로 불린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 재미도 있다. ‘석양의 화가’로 불린 윤중식(1913~2012)은 RM이 소장해 화제가 된 작가다. 실향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작품들을 남겼다. 정미소를 하던 고향집에 많던 비둘기를 그린 작품들이 많은데, 등장하는 동물 모두 한쌍을 이뤄 가족에 대한 작가의 애착을 느낄 수 있다.

박고석 ‘도봉산’, 1970년대, 캔버스에 유화 물감, 45.5×52.7cm, 이건희컬렉션

‘산의 화가’ 박고석(1917~2002)은 북한산, 지리산, 설악산 등 전국의 명산을 여행하며 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우리 풍토와 체질에서 공감”하는 회화를 지향했던 그는 짧은 호흡으로 툭툭 끊듯이 그은 붓질, 대담한 색상과 두터운 마티에르의 표현으로 산세의 강렬함을 표현했다. 겨울 설악산에서 조난을 당하고도 “십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행운”이라 여기며 눈 쌓인 설악의 풍경을 ‘잔설’ 속에 담아냈다.

‘이병철 회장의 최애’ 문학진(1924~2019)은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상반된 화풍의 그림을 남겼다. 입체주의 영향을 받은 ‘흰 코스튬’과 이병철 회장의 의뢰로 그린 서양풍의 낙원을 연상시키는 ‘목욕하는 여인들’이 함께 걸렸다. ‘목욕하는 여인들’은 폭 3m에 달하는 대작으로 한복을 입은 여인들의 모습에선 한국적 정취가 드러나지만, 서구적 이목구비와 체형, 자세가 신화를 소재로 한 서양 고전주의 회화를 연상시킨다.

문학진 ‘목욕하는 여인들’, 1973, 캔버스에 유화 물감, 170×296.5cm 이건희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문학진 ‘흰 코스튬’, 1970, 캔버스에 유화 물감, 73×60.8cm, 유족(문선, 문주) 기증

‘모두를 위한 예술’을 위한 기증

국립현대미술관 기증품의 역사는 2021년 이건희 컬렉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만1560점 가운데 기증작은 55.6%(6429점)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2021년 이건희 컬렉션 1488점, 동산 박주환 컬렉션 195점(2022년 14점 추가) 등 2047점이 대량 기증됐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건희 컬렉션이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켜 기증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활성화가 됐다”며 “이후 개인 소장가, 작가, 유족들의 기증 문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각 5점, 4점이 기증됐던 이병규·윤중식의 작품은 이후 유족들이 기증 의사를 밝혀 각 13점, 20점을 추가 기증했다. 어촌 풍경을 투박하고 강한 붓질로 그려낸 김태(1931~2021)의 유족은 아버지의 그림 38점을 기증했다.

미술이론 전문가, 미술관 관계자들의 자문을 받아 작품을 선별한 김태 작가의 유족 김수정씨는 “예술작품의 존재이유가 많은 사람들이 감상을 할 때 발생한다”며 “미술관에서 전시가 될 때 아버지의 컬렉션이 한 세트가 되어 보기 좋은 모습이 되도록 선정했다”고 말했다. 9월22일까지

김태 ‘건어장’, 1979, 캔버스에 유화 물감, 46×53cm, 유족(김미경, 김충정, 김미화, 김수정) 기증

이건희박수근구상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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