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김조은 ‘최소침습’

유년시절 간헐적 사시로 입체시력 제한

한동안 그림 멀리하며 “눈을 감옥에 가둬”

기억과 관찰을 토대로 한 ‘새로운 양안시력’

실크 위에 투시하듯 그린 몽환적인 작품들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개인전 ‘최소침습’을 열고 있는 아침 김조은 작가가 18일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아침 김조은의 그림은 투명하다. 왼쪽 측면의 얼굴을 그린 그림인데 보이지 않는 반대편의 오른쪽 눈이 보이고, 서로 포옹한 두 사람의 겹쳐진 부분까지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얇은 비단 위에 색연필과 수채로 연하게 채색해 그림의 투명도는 더 높아진다.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몽환적인 그림들은 김조은의 과거 기억 속 장면들이다. 기억과 관찰한 바를 양눈 삼아 그린 ‘투시도’다.

김조은은 간헐적 사시를 갖고 태어났다. 주의를 기울일 때는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땐 눈의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여 사시가 되는 현상이다. 사시가 있는 사람들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볼 때처럼 입체시력이 제한된다. 3D의 현실을 2D로 평면에 재현하는 정물화 속 풍경과 같다. 성인이 되어서 교정 수술을 받았지만 입체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은 유년기에 거의 결정되기 때문이다. 김조은은 그래서 자신만의 ‘양안시력’을 만들었다. 기억(memory)와 관찰(observation)을 합쳐 장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양안시력(New Binocular Vision)’이라 지칭한다.

아침 김조은 작가가 만든 자신만의 ‘새로운 양안시력’의 개념도. 기억과 관찰에 의해 장면을 구성하는 ‘새로운 양안시력’을 고안했다. 이영경 기자

“뉴욕에 온 뒤 몇 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이 저의 ‘첫 언어’였고, 항상 화가가 꿈이었는데도요. 새로운 매체로 작업하며 도전하는 걸 즐겼죠. 어느 날 어머니가 ‘왜 그림을 그리지 않니. 우울해서 그러니’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아니야 엄마, 눈 때문이야. 어릴 때부터 놀림받고 힘들었어’라고 대답했죠. 그리고선 2019년 처음 간헐적 사시에 대해 찾아봤어요. 사시가 트라우마에 가까워서 이전엔 찾아볼 생각조차 않았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저 같은 간헐적 사시였고, 그 때문에 2D와 3D를 오가며 그림을 그리는데 유리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다룬 논문을 봤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그림은 항상 나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내가 몇 년 동안 눈을 감옥에 가둬버린 건 아닌가.”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만난 김조은이 말했다.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조은은 한국에서 첫 개인전 ‘최소침습’을 열고 있다.

아침 김조은 ‘Next Time’ (2024)의 일부. 글래드스톤 제공

눈을 ‘감옥’에서 해방시킨 후 연 2019년 첫 개인전 제목은 ‘감옥에 갇힌 눈’(Eye Jailed Eye)이었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는 두 가지 규칙을 정했다. 내가 본 것, 기억한 것만을 그리겠다는 것. 다시 그림을 ‘도전적인 영역’으로 만들기 위한 제약도 걸었다. 그림을 그리기 까다로운 얇은 비단 위에, 대상을 투명하게 그리는 것이다.

“사람마다 감각하는 게 다른데도 우리는 마치 같은 걸 느끼는 것처럼 말하죠. 사실 아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몰라요. 누구의 감각도 고통도 섣불리 얘기할 수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 내가 보는 것만을 갖고 작업을 할 거야’라고 생각했죠. 우리가 함께 한 기억을 ‘나는 이렇게 보고, 이렇게 기억했어’라고 솔직하게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어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으시더라고요.”

투명하게 그리는 것도 대상에 대한 기억, 친밀감과 관련이 있다. “처음 본 꽃다발을 그린다면 앞면밖에 그릴 수 없어요. 하지만 며칠 동안 꽃을 지켜봤다면 꽃의 뒷면, 시들어 쓰러지고 있는 것들도 알 수 있죠. 제가 잘 아는 사람, 엄마나 동생 같은 가족은 뒷모습만 봐도 얼굴이 보일 때가 많아요. 친밀한 대상일수록 투명도가 높아지죠.”

아침 김조은 ‘Unshoved (빼내다, 내 목에서 뼈를 꺼내는 엄마 위 생선요리)’, 2021-2024, Stone pigment suspended in shellac, watercolor & pastel pencil, walnut ink on silk over casein color on wood panel, cotton ribbon, 46 x 60.5 x 4.5 cm 글래드스톤 제공

어떤 그림은 얇은 비단 위에 그린 두 장의 그림을 앞뒤로 전시해 두 그림이 겹쳐서 보인다. 한 기억과 얽힌 두 장면을 이중구조를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Unshoved(빼내다, 내 목에서 뼈를 꺼내는 엄마 위 생선요리)’라는 제목의 그림은 앞에는 생선 요리가, 뒤에는 목에 걸린 생선 가시를 빼주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어린 시절 생선 요리를 먹다 뼈가 목에 걸려 아파했을 때, 엄마가 손을 넣어 빼준 기억을 그린 것이다. 김조은은 “평생 양안시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입체시력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이어서 항상 열망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김조은은 경희대 미대를 졸업한 후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가 그곳에 자리 잡았다. 뉴욕대 미대에서 석사를, 컬럼비아대에서 시각예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지에서 주목받는 예술가로 떠올랐다. 전시는 8월3일까지.

작업실에 선 오카자키 겐지로 ⓒ Risaku Suzuki

장애, 질병은 어떻게 새로운 예술이 되나
뇌졸중 회복 후 시·공간에 대한 이해 바뀌어
색맹이 “대비, 질감 탐구하는 창의적 장점”

김조은이 간헐적 사시라는 장애를 새로운 예술적 감각으로 발전시켰듯, 질병이나 장애를 ‘새로운 감각’의 토대 삼아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오카자키 겐지로의 ‘Form at Now and Late’(8월17일까지)에서 겐지로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새로운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바탕으로 그린 회화와 조각을 선보인다.

오카자키 겐지로, title TBD, 2023, acrylic on canvas, 182 cm × 261 cm × 7 cm 페이스갤러리 제공

오카자키는 2020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오른쪽 팔과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절망적 상황이었다. 그때 논어의 ‘이금이후’(而今而後)를 떠올렸다. 사람들이 죽음에 임박했음을 때 더 이상 자신의 신체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죽음 직전 얻는 깨달음을 일컫는 내용이다. 오카자키는 “뇌의 일부가 죽어서 잃겠다고 생각했는데, 뇌에도 조형성이 있다고 생각해 새롭게 조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새로운 시간적, 공간적 맥락을 형성하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변했다”라고 말했다.

다채로운 색감의 반투명한 아크릴 물감을 커다란 붓으로 두텁게 칠한 점들이 독립적으로, 또 겹쳐져서 보인다. 오카자키는 “붓의 획은 마치 군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며 “어떤 섬은 처음이 됐다가, 다음엔 두 번째 섬이 되기도 한다. 시간에는 순서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성에 기반을 둔 ‘물감 섬’들은 모여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다니엘 아샴. 롯데뮤지엄 제공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개인전 ‘3024 서울’(10월13일까지)을 열고 있는 다니엘 아샴은 단색조의 명암 대비로만 원근을 표현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주로 선보인다. 조각이나 건축 작품에선 흰색을 주로 사용한다. 그가 색맹이기 때문이다.

아샴은 “색맹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내 예술 세계를 향상시켜준다. 색맹을 장애로 여기기보다 대비, 질감, 모양을 실험할 수 있는 창의적 장점으로 발전시켰다”며 “작품을 구상할 때 모양과 형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정서적인 울림에 초점을 맞춰 색의 본질을 탐구하도록 도와준다”라고 말했다.

다니엘 아샴, Fractured Idols XVII, 2024, Acrylic on canvas. 191.8 x 176.5 cm 롯데뮤지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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