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힘들고 고된 여름을 견디고 맞는 추석 연휴와 이 가을에 권하는 책. 읽고 쓰는 일에 애정이 남다른 이들이 한 권씩 골랐다.

임형남의 추천
4321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열린책들

지난봄,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두 권으로 된 1500쪽 분량의 『4321』이라는 폴 오스터의 신간 소설이 있어서 집어 들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은 휘발성이 강한 액체 같다. 문장이 차갑고 거침없이 흘러가 몰입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책을 덮으면 그 낱말과 문장들은 날아가 버리고 차가운 느낌만 남는다. 변변치 않은 내 기억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도시적이며 ‘하드보일드’한 폴 오스터만의 독특한 세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 2006년 스페인에서 기자회견 때 모습이다. [AFP=연합뉴스]

『4321』은 뒤섞어 펼쳐놓은 4편의 소설이고 4개의 인생 이야기이다. 4명의 주인공은 사실은 모두 퍼거슨이라는 한 남자이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도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각자의 역할과 상황이 다르며, 이번에도 역시 배경은 미국 뉴욕이다. 그 안에서 퍼거슨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며, 그가 죽거나 살아남아서 엮어내는 이야기가 빨리 돌리는 영화 필름처럼 펼쳐진다.

이야기들이 마구 섞여서 나는 도표를 만들어 구조적으로 이해하며 읽어야 했다.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헤매다 보니 문득 출구가 나오고 소설은 끝난다. 마치 마른 잎이 나뒹구는 11월 말의 뉴욕이나 브루클린의 어느 뒷골목으로 불쑥 나온 느낌이었다.

책을 덮고 이틀 후 소설가 폴 오스터의 부고를 들었다. 마치 그의 소설이 연장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이야기와 더불어 폴 오스터 자체가 증발하였다.
글쓴이=임형남(건축가, '가온건축' 대표)

신형철의 추천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한정원 지음
난다

내가 고른 이 얇고 가벼운 책의 저자는 2020년 『시와 산책』이라는 무덤덤한 제목의 책과 함께 출판계에 나타났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놀랐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놀란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책의 제목은 이 글에서 왔다.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중략) 우주의 빛을 소리로 변환하는 기술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다. 여름의 빛이 매미 소리로 변신했다고 상상한 그날로부터, 그 소리가 환호성으로 들리고 있다.”

우리는 비판할 때 쓰는 똑똑한 어휘는 많이 가졌지만 찬탄할 땐 적당한 어휘가 없어 허둥댄다. 한정원의 산문을 두고 ‘아름답다’라고 적어봤자 한심해질 뿐이다. 예술의 여러 가치 중에 심미적 가치가 이만큼 결연한 산문을 만나긴 정말 어렵다. 옛 개념으로 말하면 언어 그 자체가 전경화(前景化)돼 있는 글. 그걸 돌에 새긴 걸 보듯 읽게 된다.

문장 만으론 문장이 안 된다. 문장은 마음이 찍어내는 것이니까. “예전처럼 사람들을 돕고 살지 못하는 것, 그것이 늘 내 마음의 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마음 말이다. 그가 동물을 구하고 동물로부터 구해지는 이야기를 읽을 땐 온몸이 긴장된다. 나는 사람들이 그의 문장만큼이나 그 마음의 깊이를 질투했으면 좋겠다. 나는 감히 질투도 못 한다.
글쓴이=신형철(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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