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성의날인 지난 8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이 여성들의 삶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담은 비누 장미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성동훈 기자

오는 4·10 총선을 앞두고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다시 주목할 만한 정책으로 떠올랐다. 더불어민주당 등 일부 정당이 총선 여성정책 공약으로 제시하고 나서면서다. 앞선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됐지만 제대로 논의조차 못한 채 폐기하는 일이 허다했던 이 공약을 놓고 각 정당의 입장과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일단 법 도입에 적극적인 쪽은 야권이다. 민주당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공약집에 기존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여부’로 바꾸는 내용을 담은 형법 297조 개정안을 포함시켰다. 피해자 보호 실효성 강화를 위해 필요한 공약이라는 설명도 넣었다. 앞서 여성계는 현행법상의 강간죄 구성요건이 실제 성폭력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며 개정을 주장해왔다. 피해자 의사에 반해도 저항하기 곤란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간죄 성립을 인정하는 법 조항과 판례 해석 때문에 처벌 사각지대가 생긴다는 지적이다.

녹색정의당은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겠다”고 뚜렷하게 공약을 밝혔다. 새로운미래는 공약집에는 담지 않았지만 지난 7일 ‘3·8 세계여성의 날’을 하루 앞두고 발표한 공약에서 형법 297조를 개정하는 내용의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약속했다.

반면 여당인 국민의힘은 별다른 공약을 내놓지 않았다. 일부 의원들이 비동의 강간죄 도입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지만 당의 공식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2022년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청년본부 양성평등특별위원회가 비동의 강간죄에 대해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내몰고 허위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를 장려해 수많은 무고죄를 양산할 가능성이 농후한 악법이다”는 성명을 낸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월 여성가족부가 비동의 강간죄 도입 추진을 발표하자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합의된 관계였음에도 이후 상대방 의사에 따라 무고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지난해 1월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 평등정책 기본계획 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입장은 엇갈린다. 여가부 발표 이후 즉각 “법률 개정 계획이 없다”고 밝힌 법무부는 여전히 신중하다. 법무부는 법 개정 계획이 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학계 등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해외 입법례 연구를 포함해 성폭력범죄 처벌법 체계 전체에 대한 사회 각 층의 논의를 거치는 등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와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대법원은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 해석 범위를 넓혀왔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강제추행죄 성립 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이 인정되려면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여야 한다’는 기존 판례를 폐기했다. 대신 ‘가해자가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했다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새 기준을 제시했다.

실제적인 법 개정으로 이어져 강간죄 구성요건이 ‘동의여부’로 바뀔 경우 성범죄 관련 수사·재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강제추행죄와 달리 강간죄는 아직 전향적인 판결이 나오지 않다보니 하급심 법원에선 여전히 폭행과 협박의 범위를 좁게 해석하고 있다”며 “법원 판결만이 아닌 입법으로 강간죄 구성요건을 명확히 하면 수사단계에서부터 ‘동의여부’를 강간죄 구성요건으로 보는 인식들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권수현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조교수는 “성적관계에 있어서도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게 국제사회의 일반적 규범인데 한국사회에서 아직까지 수용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며 “상호 간 동의를 전제로 성폭력 피해 확산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 법 취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동의여부’ 판단이 어렵고 지나치게 처벌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성폭력 사건을 주로 담당하는 한 변호사는 “한 사람의 주장으로 내밀한 영역 속에서 동의가 없다는 걸 어떻게 입증할거냐의 문제가 여전히 있다. ‘동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한국사회에선 오히려 혼란만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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