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7월10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회원들이 사법부의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시민 참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가끔 그런 전화를 받는다. 기사화할 만한 아이템을 갖고 있는데 어느 기자, 어떤 언론사와 접촉하면 좋겠느냐는 문의. 특히 젠더 관련 이슈는 기자와 언론사를 많이 타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은 더욱 첨예하다. 젠더 의식이 투철한 데다 사안을 끝까지 파헤칠 만한 능력과 의지가 있는 기자, 이를 수긍하고 키워줄 데스크의 존재, 아이템 특성상 방송, 지면, 유튜브, 온라인 중 어떤 매체가 시각적으로 잘 구현할 것인지, 보도의 파급력은 어디가 클 것인가 하는 고민이 제보자로서는 있을 수밖에 없다.

성폭력 보도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건 당사자인 이들이 직접 사건을 해결한 과정을 동시적으로 기록을 남긴다. 서로 다른 젠더 폭력 사건의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사건 보도의 재현 윤리도 함께 고민한다. 이것은 고스란히 보도에 접목이 된다.

2018년 ‘미투’ 국면을 떠올려보자. 당시에는 피해자들이 직접 뉴스 스튜디오에 등장해 인터뷰에 응하는 형태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낳았다. 서지현 검사, 김지은 비서, 최영미 시인 등 ‘미투’ 당사자들이 JTBC 뉴스룸에 인터뷰이로 등장, 자신의 피해 경험을 폭로했다.

▲ 2018년 3월5일 김지은 충남도 정무비서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사진=jtbc 뉴스룸 보도 갈무리

‘미투’는 권력을 향한 고발의 형태를 띠지만, 전통적 저널리즘의 시선에서는 ‘기계적 중립’에 입각해 세세하게 따져 물어야 하는 이슈였다. 그래서 인터뷰어는 세간의 통념을 그대로 흡수한, 기계적 중립자를 자처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세간의 통념’이란 보통 ‘성폭력 피해자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피해자다움’을 담고 있기에 질문은 때론 폭력적이었다. 뉴스룸의 ‘미투’ 피해자 인터뷰는 사안의 심각성을 알리는 동시, ‘피해자의 자격을 묻는 유일한 범죄는 성폭력 범죄’라는 불합리한 도식을 그대로 재생산했다.

최근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을 보면 보도의 패턴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해당 사건은 올초 탐사보도 전문 매체 셜록에서 가장 먼저 보도했다.(<범인은 서울대에 있다>) 이후 지난달 20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서울대 N번방’이란 타이틀로 ‘단독’ 기사가 나갔다. 이어 범인을 잡기 위해 연대한 피해자들과 이에 조력한 추적단불꽃의 활동가, 원은지 얼룩소 에디터의 추적기를 담은 전자책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가 출간됐다.

셜록의 기사는 소설처럼 내러티브가 살아 있는 ‘전지적 기자 시점’의 서술이다. MBC 뉴스는 기존의 공중파 뉴스 문법에 충실했다.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는 취재 기자이면서 범인을 좇는 당사자인 원 에디터 1인칭 시점으로 쓰여졌다. 각각의 매체가 각자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같은 사건을 재구성했다.

이 가운데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가 천착한, 성폭력 보도 방식은 ‘당사자성’이었다. 6년 전 ‘미투’ 국면에서도 뉴스 스튜디오에 직접 등장한 피해자의 발화가 도화선이 됐지만 얼룩소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피해자가 직접 범인을 추적하고 사건을 해결해가는 창구 역할을 했고 이를 직접적으로 알렸다.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 피해자 루마는 원 에디터와 집요한 추적을 이어가면서, 같은 사건의 피해자들을 모으는 동시 관련 내용을 얼룩소에 연재했다.

▲ 얼룩소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 기사 갈무리. 사진=열룩소 홈페이지

얼룩소는 젠더 폭력 피해자들이 연대하고 공조하는 장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간다. 특히나 딥페이크 같은 디지털 성범죄는 범죄 수법이나 피해 양상이 전에 없던 것이기 때문에, 심각성을 일반에 알리는 데 많은 품이 든다. 가시화되지 않던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언어를 벼리는 한편으로 재현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이에 서로 다른 성범죄의 피해자들이 얼룩소를 통해 공조에 나섰다. 토크쇼를 열어 머리를 맞대고, ‘지인능욕’ 같은 가해자 중심적인 성범죄 명명을 바로 잡는 일을 도모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피해자들은 최종적으로 작가가 됐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 씨는 책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를, 교원평가 성희롱 피해자 가넷은 ‘한국에서 교사로 산다는 것’을 펴냈다. 김 작가는 “기사 한 줄이 아니라,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범죄 피해자가 놓인 현실을 자세히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얼룩소 <“비하인드 말할게요, 얼룩소 첫 종이책 냈으니까”> 2024.03.22) 납작한 ‘기사 한 줄’에만 머무르지 않고, 생생하고 정돈된 언어로 독자들과 직접 만나겠다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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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22일 MBC 뉴스데스크 ‘서울대 n번방’ 단독 보도 취재 과정 보도 갈무리. 사진=MBC 뉴스데스크 유튜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나에게 연락한 취재원들도 김 작가처럼 ‘기사 한 줄’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 내 이야기가 사소화되거나, 소위 ‘야마’를 위해 굴절되거나 혹은 ‘팔리는 기사’를 위해 자극적으로 다뤄질 가능성 모두를 염두에 두고 어느 언론사, 기자와 만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예를 들면 MBC의 ‘서울대 N번방’ 보도는 ‘N번방’을 호명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파장을 몰고 왔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한 호명이었고, 이후 디지털 성범죄를 두고 사안별로 경중을 논하게 하는 불필요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젠더 폭력의 양상이 심화되고 고도화될수록, 피해자들은 더욱 엄정하게 언론에 묻고 있다. 내 얘기를 들을 준비가, 말할 준비가 되었느냐고. 나는 ‘피해자’로 일컬어지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건 해결의 당사자라고.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언론사가 몇이나 될까. 저널리즘 윤리와 함께, 조직과 개별 기자의 성 인지 감수성부터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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