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고문방지위원회가 뭘 이렇게 나댑니까.”

이충상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상임위원이 11일 오전 열린 9차 상임위원회에서 한 말이다. 이 상임위원은 “이주 가사노동자들의 급여 액수에 관해서 고문방지위원회가 나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에 앞서 “(특정 사안들에 관해) 유엔 자유권위원회·아동위원회·여성차별철폐위원회·고문방지위원회가 실적을 쌓고 선명성을 나타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권고한다. 실제 그런 일들이 막 벌어지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이날 상임위를 방청한 전문가들은 “국제인권규범에 무지한 상임위원들이 국제인권기구를 모욕하는 말 잔치를 들으며 놀라웠다”고 말했다. 인권위의 한 관계자는 이충상 위원의 ‘나댑니까’ 발언과 관련해서 “인권위원으로서 사석에서도 해서는 안 될 소리”라고 했다.

이날 인권위원들은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에 제출할 고문방지협약 독립보고서 안건을 상정해 논의했다. 정부는 오는 7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에 고문방지협약 이행에 관한 제6차 국가보고서를 제출하고 유엔 고문방지위는 이를 심의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권위 시각을 반영하기 위해 독립보고서 안을 심의한 것이다.

유엔 고문방지협약은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논평 및 일반권고를 통해 고문 행위만이 아니라 비인도적이거나 굴욕적인 대우에 관한 모든 문제를 포괄해서 다룬다. 1987년 6월 발효됐고, 한국은 1995년 1월 가입했다. 현재 171개 나라가 당사국인데, 고문방지 위원은 투표로 선출한다. 이번에 상정된 인권위의 고문방지협약 독립보고서 안은 고문의 정의, 고문 공소시효, 사형제, 군대 내 학대, 국가보안법, 이주노동자 폭력 등 총 48항목으로 돼 있다. 이는 유엔에서 정한 기준과 최종견해, 대한민국 정부의 쟁점목록, 인권단체 등의 의견서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하고 반영해 작성한 것이다.

이충상 위원이 언급한 이주 가사노동자들의 급여액수는 고문방지협약의 ‘이주노동자 폭력’ 항목에 속하는 것으로 이주노동자 최저임금제 적용 보장에 관한 내용이다. 이 위원은 “임금을 적게 주는 문제는 고문에 준하는 것이 아니다. 권고가 지나쳐서 대다수 국민이 거부감을 갖는다”고 했다. 김용원 상임위원도 “고문방지위원회에 보내는 보고서에 국내 모든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게 맞는지 심히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충상 위원은 또 “(국가보안법 폐지 또는 개정에 관해)자꾸 국제사회의 권고를 이야기하는데…그것은 국제사회 전반이 아니라 진보적 국제인권기구다. 여러 국제기구 중 진보적 인권기구가 권고한 거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대한민국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일”이라고 했다.


김용원·이충상 두 상임위원은 국제인권기구의 권고와 관련 국내 인권문제를 폭넓게 논의하는 것에 강하게 피로감을 드러냈다. 김용원 위원은 “유엔 인권 관련 기구들이 많은데, 대한민국이 이런 유엔의 기구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게 바람직하고 합리적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면서 관련 보고를 한 윤채완 인권정책과장에게 “고문방지위원회에 가입한 다른 나라들도 이렇게 포괄적으로 하고 있는지 관련 자료를 제출해달라”고 요구했다. 인권위 관계자에 따르면 이주노동자 최저임금 이슈는 고문방지협약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인권단체의 의견을 수용해 ‘착취’의 문제로 접근해 넣었다고 한다.

두 상임위원의 문제 제기와 관련 송두환 위원장이 헌법 제6조의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는 조항을 언급하며 국제법 존중주의를 이야기하자 이충상 위원은 “누가 그걸 부인하냐, 내 얘기를 왜곡하지 말라”고 했고, 김용원 위원도 여기에 동조하면서 소란이 일었다.

4일과 11일, 고문방지협약을 논의한 상임위를 연속으로 방청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서채완 부소장(변호사)은 “고문방지 협약을 아는 사람이 독립보고서를 심의해야 하는데, 고문방지 협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심의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 인권위에서도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반영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이슈를 제기한다”고 했다. 서 변호사는 "가령 고문방지위원회는 세이셸과 쿠웨이트 심의 때 임금 문제를 착취 및 비인도적 처우 문제로 보아 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영국의 국가인권기구는 취약집단에 대한 사회복지서비스 미제공을 비인도적 처우로 보고했다”고 했다.

서 변호사는 또 “이충상 위원이 유엔 조약기구를 모욕하고 비하했다. 고문방지위원회 조약을 비준한 회원국으로서 인권기구를 진보와 보수로 나눈다거나 실적 경쟁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라고 말했다. 이충상 상임위원은 상임위가 끝난 뒤 한겨레에 “비하도 아니고 외교적 결례도 아니다. 국제기구 중 유엔안보리와 같이 중도적인 기구도 있고 고문방지위와 같이 진보적인 기구도 있다”고 했다.

이날 상임위에서 김용원·이충상 위원은 “북한이 반국가단체로서 엄연히 실존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상황에서 국가안보가 더 위험해졌다”등의 이유를 들어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에 대해서 명백한 반대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남규선 상임위원은 “32년 동안 유엔 자유권조약위원회가 국가보안법 폐지 또는 개정에 대해 5번의 최종견해를 발표했다. 인권위도 2004년부터 폐지를 권고했다”면서 “이 내용은 꼭 포함돼야 한다. 간곡하게 호소드린다”고 했다.

김용원 위원은 사형제 폐지 반대 입장도 지난 상임위에 이어 다시 한 번 밝혔다. 두 위원은 ‘항문성교 및 기타 추행을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는’ 군형법 92조6항 폐지에도 반대한다. 인권위는 이날 독립보고서 제출에 대한 의결을 미루고 다음 전원위원회에 재상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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