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폐공사 소속 디자이너로 5만원권 신사임당 초상을 담당한 가성현 책임연구원(오른쪽)과 ‘인왕제색도 요판화’를 작업한 신인철 연구원이 작품을 들고 함께 포즈를 취했다. 김경록 기자

비 갠 뒤 안개가 피어오른 인왕산의 경치를 호방한 붓놀림으로 담아낸 겸재 정선(1676~ 1759)의 ‘인왕제색도’. 2021년 국가에 기증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국보 산수화다.

한국조폐공사 디자인연구센터 소속 신인철(57) 연구원은 지난 1월부터 석달 동안 인왕제색도를 수십만개의 점과 선으로 해체·재구성해 그렸다. 다시 석달간 이 밑그림을 특수합금판에 일일이 옮겨 새기고 깎아냈다. 이렇게 완성된 요판(凹版, 오목판)에 잉크를 바르고 종이를 눌러 찍자 기암괴석의 농담(濃淡, 짙고 묽음)이 절묘하게 구현된 ‘인왕제색도 요판화’가 탄생했다.

지난 17일 인왕제색도 요판화가 시중에 예약 판매되기 시작한 날, 조폐공사 상품을 전시·판매하는 서울 마포구 오롯디윰관에서 신 연구원과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한 가성현(55) 책임연구원을 함께 만났다.

요판인쇄란 한국조폐공사가 은행권을 찍어낼 때 쓰는 고도의 인쇄기법이다. 지폐(천원, 오천원, 만원, 오만원) 표면을 만질 때 오톨도톨 느껴지는 촉감이 이 특수기술 때문이다. 특수 보안잉크 등이 사용돼 위변조 복제가 불가능한 게 특징이다. 인왕제색도 요판화에도 이 같은 화폐 보안기술이 총동원됐다.

요판작업은 1㎜도 채 되지 않는 미세한 선과 점을 구사해야 하고 화폐 보안기술과 직접 연관돼 있어 전수가 제한적이다. 조폐공사 안에서도 이들만 ‘장인’급으로 구사 가능하다고 한다.

이날 대형(824×546㎜) 300점, 중형(526×356㎜) 500점, 소형(310×196㎜) 2000점이 한정 출시된 인왕제색도는 조폐공사와 한국박물관문화재단을 통해 예약 접수를 받자마자 빠르게 팔려나가고 있다. 소형 버전은 MZ세대의 호기심을 겨냥해 현미경급 렌즈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미세문자와 인왕산 호랑이 그림 등을 심었다. 1996년 나란히 공채 입사한 이들은 원래 서양화를 전공한 미대 출신이다. 대전시 초대작가(신인철) 등 개인 이력도 있지만 대표작은 우리 지갑 속에 있다. 신 연구원은 2005~2006년 새은행권 제작 때 천원권과 오천원권 초상을, 가 연구원은 같은 기간 오천원권 초충도와 2008~2009년 오만원권 초상(신사임당)을 담당했다. 표준영정을 기준 삼아 화폐 용도의 원화를 그린 뒤 요판 공정을 마칠 때까지, 한 사람이 개별 ‘작품’을 전담하는 구조다.

두 사람이 동서양 명화를 요판화로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 홍보·기념품 용도로 이중섭·박수근의 대표작과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등을 선보여서 호응을 얻었다. 인왕제색도는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측과 협업해 우리 문화유산을 소재로 상품화에 나선 첫 사례다.

‘이건희 컬렉션’ 순회전시 때 원화를 감상했다는 신 연구원은 “비 온 후 운무(雲霧) 표현이 가장 고민스러웠는데, 밝은 부분은 점과 점 사이 간격을 넓게 했고 어두운 부분은 촘촘하게 새기면서 잉크가 많이 스며들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잉크와 먹의 유사성 때문에 서양 채색화보다 한국 수묵화가 요판화에 훨씬 잘 맞는 것 같다”고도 했다.

조폐공사는 앞서 특정 스타의 팬덤을 겨냥해 요판화를 적용한 ‘손흥민 메달’ ‘BTS 지폐형메달’ 등을 선보여 완판시킨 바 있다. 우진구 홍보실장은 “신용카드와 모바일페이 등이 확산하면서 지폐를 찍어내는 게 예전같지 않아서 조폐공사 나름의 새로운 매출 창구를 찾는 셈”이라고 말했다. 조만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요판화도 제작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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