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3대 비극작가 3 -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아이스킬로스는 포퓰리스트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만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무려 13회나 우승한 그리스 비극 시장의 첫 스타 작가였습니다. 그가 오디션 스타로 이렇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독재자가 기획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의도에 가장 충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시대든 독재자는 시민이 정치와 권력에 관심 갖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을 항상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 섹스Sex, 시민이 열광하고 푹 빠질 수 있는 이 3S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디오니소스 대축제도 그리스 시대에는 3S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3일 동안 계속되는 대축제 기간에 밤낮없이 ‘부어라’, ‘마셔라’ 하며 뿜어져 나오는 시민들의 광기가 도리어 위험하다고 느꼈던 걸까요? 독재자는 그 광기가 혹시나 자신과 권력에 대한 불만과 분노로 바뀔까 두려웠던 걸까요? 서둘러 정화(淨化, Catharsis)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필요했습니다. 그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데 그리스 비극이 딱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집단적 광기는 비극의 공포 앞에 먼저 숨을 죽입니다. 운명의 굴레가 가혹할수록 시민은 너나없이 스스로 현실에 만족하고 순응합니다. 독재자는 은막 뒤에서 비로소 숨을 돌립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거기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이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 보다 운명적으로! 더욱 비극적으로!’ 이렇게 그리스 비극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오디션 기획자를 미소 짓게 만든 겁니다.

《오레스테이아》는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이야기입니다. 앞서 《오디세이아》에서 잠깐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디세우스가 지옥에 갔다가 아가멤논을 만나 그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되죠.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첫날 밤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정부(情夫)와 짜고 자신을 도끼로 쳐 죽였다고. 《오레스테이아》는 이렇게 아버지를 잃은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막장 이야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막장에 소시민들은 보다 쉽게 빠져드니까요.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사연이 깊습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대표적인 양대 막장 가문 중 하나인 아트레우스 가문의 장자입니다. 오레스테스의 고조부인 탄탈로스로부터 그 막장의 전통은 시작됩니다. 탄탈로스는 제우스와 요정 플루토 사이에서 태어나 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오만을 낳았습니다. 그는 감히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해 막내아들 펠롭스를 죽여 그 고기로 국을 끓여 대접했습니다. 아침 드라마는 물론이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느 막장과 비교해도 그 출발부터가 차원이 다릅니다.

신들은 격노했습니다. 탄탈로스는 가이아의 자궁, 지옥 타르타로스로 추방되고, 그의 후손들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벌이게 될 거라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 저주는 증손자 아가멤논까지 이어진 겁니다. 아가멤논은 사촌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사촌과 조카를 비참하게 죽이고, 그 피범벅 위에서 그녀를 겁탈하고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그녀가 바로 클리타임네스트라입니다. 이런 막장은 호러 장르로 분류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레스테스의 후회,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전남편과 아들을 살해한 자와 한집에 사는 클리타임네스트라, 보통 여자였다면 미쳤을 겁니다. 그러나 아가멤논과 사이에서 2녀 1남까지 두자 불쌍한 자식들만 생각하며 겨우 목숨만 이어갑니다. 그런데 막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전쟁에서 신의 노여움을 푼다며 아내에게는 큰딸을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킨다고 데려가 신의 제물로 바쳤던 겁니다.

제단에 오르기 전 큰딸은 “아직은 햇빛을 보는 게 더 달콤하다”며 애원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러고도 나에게 당신의 무사 귀환을 기도해주길 바랄 수 있겠느냐?”며 아가멤논을 협박합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끝내 큰딸을 제단에 올립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결국 정신줄을 놓아버립니다.

이런 사연 속에서 10년 만에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을 그날 밤에 도끼로 쳐 죽인 겁니다. 이 과거를 모른다면 정부와 짜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을 죽인 요부(妖婦)겠지만, 아가멤논의 광기에 돌아버린 그녀의 10년을 이해한다면 누가 누굴 탓하겠습니까?

“아내가 정부와 바람나서 자신을 죽였다.”고 저승에서 만난 오디세우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여자를 믿지 말라”고 하는 아가멤논의 하소연에 누가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클리타임네스트라를 거리에 끌고 가 “이 요부를 누구든 나와 돌로 쳐 죽이라”고 할 때 과연 누가 나서 당당히 돌팔매질할 수 있겠습니까? 막장의 유일한 문학적 장치는 어쩌면 악인도 악행할 최소한의 근거를 깔아둔다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금동서가 똑같은지 모릅니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는 그런 여자를 어머니로 둔 오레스테스와 누이 엘렉트라가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의 과거를 알지 못했나? 아버지 아가멤논의 광기를 어떻게 생각했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속이고 큰누나를 신의 제물로 바친 것에 배반감을 느끼지 않았나?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잃어버린 10년을 전혀 공감할 수 없었나?

그래서일까요?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이기 전에 잠시 머뭇거립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도 아들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이건 아니라고. 그러나 오레스테스 개인의 판단을 넘어서는 가문의 저주와 비극은 마침내 피를 뿌립니다. 탄탈로스의 오만이 빚은 신의 저주는 5대에 걸쳐 골육상쟁으로 이어갔고, 마침내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이는 것으로 비극은 클라이맥스를 맞습니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이고 난 후 자신을 합리화하듯 “당신이 당신을 죽인 겁니다”라고 소리칩니다. 두렵고 괴로운 겁니다. 어쩌면 비겁한 겁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상황에 이끌려 행동한 자들이 내뱉는 변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의 이 마지막 변명은 사실은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자식이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힘듭니다. 이 비극적 운명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주인공의 갈등과 아픔이 깊고 짙을수록 관객은, 시민은 더욱 흥분한다는 경험을 아이스킬로스가 최대한 활용한 겁니다.

오레스테스는 신들의 재판에 회부됩니다. 재판은 ‘아버지의 복수라는 불가피한 의무’와 ‘어머니를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불가피한 의무’ 사이에서 대립하지만, 가까스로 무죄로 방면됩니다. 그리고 그 두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한 오레스테스를 불쌍히 여겨 가문의 저주도 풀어줍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은 막장의 끝으로 치닫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극적인 화해로 마무리합니다. 가족 간의 질긴 악연으로 어쩔 수 없이 죽고 죽이는 막장의 끝도 결국은 ‘위 아 더 월드 We are the world’로 마무리됩니다. 시민들도 자신의 운명까지 쓰다듬으며 마침내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오디션을 기획한 위정자의 의도를 교묘하게 간파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13회 우승자다운 아이스킬로스의 노회한 마무리였던 겁니다.

그러나 신도, 아이스킬로스도, 관객도 오레스테스만큼 클리타임네스트라만은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골육상쟁의 저주에만 집착했을 뿐 복수의 인과(因果)에 편파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은 이 신화의 스토리를 달리 구성했습니다. 당연히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변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된 겁니다.

-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가디언, 2022)

 

최봉수 칼럼니스트

최봉수

김영사 편집장
중앙 M&B 전략기획실장
웅진씽크빅 대표이사
메가스터디 대표이사
프린스턴 리뷰 아시아 총괄대표
주요 저서 <출판기획의 테크닉>(1997), <인사이트>(2013),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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