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계 노벨상 '프리츠커상' 수상…야마모토 리켄이 본 한국의 건축

“저출생 풀려면 이웃과 연결된 집을 만들어야”

‘건축계 노벨상’ 프리츠커상, 지난 3월 발표된 2024년 수상자는 일본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79)이다. 심사위원회는 “그의 공간은 공동체를 회복시킨다”고 평가했다. 대표 프로젝트 중 하나인 한국의 ‘판교하우징’에서 17일 야마모토를 만났다. 그는 “주택공급 시스템이 저출생·고령화 문제를 불렀다”는 화두를 던졌다.

올해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야마모토 리켄. 수상 직후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0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 위치한 ‘판교하우징’(산운2단지월든힐스)의 초기 분양 실적은 처참했다. 당시 토지주택공사(LH)가 새로운 집합주택을 짓겠다며 세 블록의 주택용지를 놓고 이례적으로 국제설계공모전을 열었다. 미국·핀란드·일본 건축가가 각각 뽑혔고, 그중에서 일본 건축가인 야마모토 리켄이 설계한 2단지만 미분양이 났다. 총 100가구 중 계약한 가구 수가 10여 가구뿐이었다. 후분양으로 지어진 집을 둘러본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금붕어 어항 같다. 여기서는 못 산다.”

판교하우징의 전경. 10~13가구가 마당을 공유하며, 이 마당을 통해 2층 통유리 출입 공간에 들어선다. 사진 야마모토 리켄 설계 공장

2층 출입 공간을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로 만든 탓이다. 타운하우스인 판교하우징은 3~4층 규모의 집 한 채에 한 가구가 산다. 1층은 거실·주방 및 안방, 2층 출입 공간, 3층 아이들 방이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2층으로 올라와 공동의 마당을 지나 각 집으로 출입한다. 10~13가구가 엘리베이터와 하나의 마당을 공유한다. 기존 집과 다른 구조에 처음엔 외면당했지만, 약 3년 만에 다 팔렸다. 사람들이 입주하면서 상황은 더 반전했다. 완공 10년 뒤 입주민들은 야마모토에게 감사편지를 보냈다. 지난 17일엔 주민들이 야마모토를 초청해 프리츠커상 수상을 축하하는 자리까지 마련했다. 13년 차 주민 김영부(69)씨는 입주 당시 건축가와의 약속이라며 그동안 찍어온 단지 사진을 모아 발표했다. 사진 속 주민들은 집을 넘나들며 모이고, 먹고, 웃고 있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당연한 요즘, 낯선 풍경이었다.

오늘날의 모습을 예상했나.
“공모전 할 때 솔직히 당선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출품했다. 당선돼 놀랐다. 커뮤니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만든 단지 중에서 처음 실현된 단지다. 근대화 이후에 주택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외부에 열려 있던 주택이 밀실 같은 주택으로 변했다. 판교하우징의 2층 출입 공간을 통유리로 한 것은 그 공간을 카페·술집·갤러리 등으로 바꿔 외부 사람들도 오고, 주민들도 돈 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길 바라서였다. 개인적으로 막걸리 바가 생기면 정말 좋겠지만, 법률상 주거전용지역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야마모토가 생각하는 좋은 집

2차대전뒤 ‘1가구 1주택’ 공급시스템
수용시설 같은 폐쇄된 집이 세계 휩쓸어
주변 이웃도 함께 좋은 집 만들어야
한국은 정부 건축 통제 강해 아쉬워

지난 17일 판교하우징 입주민의 초청으로 방문한 야마모토 리켄. 장진영 기자

판교하우징엔 2층 유리 공간을 미술학원으로 쓰는 집이 있다. 집주인인 김미경(54)씨는 “원래 월세 내며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살면서 학원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이사 왔다”며 “현관문만 열면 차가 다니지 않는 마당이 펼쳐지니 아이들도 안전하고, 여기서 이웃이자 선생님으로 살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주거지에서 생산 활동이 일어나는 게 어려운데.
“정부의 주택공급 시스템이 가장 문제다. 저출생·고령화 문제도 지금 같은 주택공급 시스템 때문이라 생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도 유럽·미국의 주택 모델을 일제히 따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살기 위한 수용시설 같은 주택이 공급됐다. ‘1가구 1주택’이 이때 등장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 집에서 여러 세대가 살며 상부상조했다. 하지만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가족 4명을 구성원으로 하는 ‘표준가족’이 만들어졌고, 그에 맞춘 주택이 대량공급됐다. 하지만 산업이 또 바뀌었고, 1인 가구도 엄청나게 늘었다. 하지만 주택공급 정책만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과거 상부상조하던 시절로 회귀하자는 건가.
“인공지능(AI)과 같은 기술의 발달로 더는 모여서 일하는 큰 공장이 필요하지 않다. 온라인으로 연결돼 재택근무하는 이도 늘었다. 사람들이 만나고 일할 수 있는 주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집은 일과 가정이 양립하기도 편하다. 노약자를 보살피기에도 좋다. 사회보장 서비스를 위해 많은 국가 예산을 쓰는데, 일하고 서로 도울 수 있는 집과 동네를 만든다면 결국 국가 경쟁력도 강해진다.”

야마모토 리켄이 2010년 설계한 ‘판교하우징’(산운2단지월든힐스)의 전경. 2층 현관 공간을 통유리로 설계해 초창기에 미분양이 났다. 하지만 이 주택은 그의 대표 프로젝트가 됐다.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집이라는 이유에서다. [사진 프리츠커상 홈페이지]

지금의 도시계획 체계에선 어려운 것 아닌가.
“결국 전후 도시계획이 실패한 거다. 용도지역을 나누고 주거·상업 등을 분리하면서 집은 아무런 생산 기능이 없는 단순한 수용시설이 됐다. 돈을 그렇게 많이 들여 짓는데 아무런 생산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나.”
집은 쉬기 위한 곳이 아닌가.
“휴식만을 위한 집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있다. 집에서 오로지 쉬고 싶은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장사를 한다든지 생산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이 더 많을 거다.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 그 지역만의 산업도 발전할 수 있다. 집은 그렇게 사회로 확장하고 연결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제도와 법이 가로막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보안을 중시하며 더 폐쇄적인 집을 좋아하는데.
“오랜 시간 그런 집이 좋다고 학습된 탓이다. 그렇게 폐쇄적인 집에서 생활하면서 얻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독립성이고, 잃어버리는 것은 지역사회와의 관계다. 민간주택업자의 입장에서 보면 집을 팔 때 내부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좋다. 주변 환경까지 개선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결국 사생활 보호를 강조하며 이익을 챙기고 있다.”

지난 17일 성남 판교하우징 입주민들은 야마모토를 초청해 감사 인사와 함께 프리츠커상 수상 축하행사를 열었다. 한은화 기자

서울 강남구 세곡동 보금자리주택 3단지도 국제설계공모전에 당선돼 야마모토가 설계했다. 2013년 완공한 이 임대아파트에는 총 1065가구가 산다. 나이가 연로한 주민들이 서로 가깝게 지내며 보살필 수 있게 두 동을 마주 보게 디자인했다. 현관문을 유리문으로 했다가 역시나 난리가 났다. 결국 유리문에 불투명 시트지를 붙였다. 야마모토는 “저소득 계층이 사는 곳인 만큼 집에서 김치를 판다거나, 차를 판다거나 생산 활동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디자인이었다”며 “외부에 노출되는 공간과 사생활이 보호되는 공간을 분리해 설계했지만 결국 실현할 수 없었다”고 했다.

판교하우징 1층 중정의 모습. 사진 프리츠커상ㆍ남궁선 작가

좋은 집이란 뭔가.
“커뮤니티가 살아 있는 집이다. 나만 좋다고, 건축주만 좋다고 만드는 집은 절대 좋은 집이 될 수 없다. 주변 사람들도 함께 좋을 수 있는 집을 만드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다.”
일본은 1979년 이래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9명이다. 비결이 뭔가.
“그나마 주변을 생각하는 건축가들이 상을 받는 것 같다. 건축의 사회적인 역할을 고민하는 건축가들이다. 장인정신이 살아 있는 치밀함도 수상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겉으로만 사회적인 역활을 고민하는 척하고 건축주만을 위해, 자신의 유명세만을 위해 건축하는 건축가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본 건축의 장래가 밝지 않다.”
(아직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없는) 한국 건축은 어떤가.
“건축가가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시스템이 없는 게 문제다. 건축가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설계까지만 관여하고 감리를 못 한다. 치밀한 건축을 하기 위해 건축가가 감리까지 관여해야 한다. 특히 공공건축 프로젝트에서 정부의 통제가 너무 강하다. 외국 건축가들에게는 자유를 주면서 말이다.”
서울에선 도쿄의 아자부다이힐스 같은 초고층 재개발 사례를 혁신모델로 꼽는데.
“최악이다. 부자들만을 위한 프로젝트다. 디벨로퍼만 엄청난 돈을 번다. 그런 집들은 비쌀수록 더 잘 팔린다. 비싸게 되팔 것을 생각하는 투자가들이 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정부가 임대주택을 꾸준히 공급하고 있어 다행이다.”

야마모토가 설계한 서울 강남구 세곡동 보금자리주택 3단지의 전경. 사진 야마모토 리켄 설계 공장

1945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야마모토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갔다. 68년 니혼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71년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예술 연구과를 수료한 후 73년 ‘야마모토 리켄 설계 공장’을 요코하마에 설립했다.

“어항 같다” 미분양 판교하우징 반전

주택 2층이 통유리 거부감 컸지만
탁 트인 공간 매개로 이웃간 교류
주민들, 야먀모토 초청해 감사 파티

공동체가 살아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은 그가 평생 실천해 온 일이기도 하다. 지난 18일 서울대에서 ‘함께 살기’를 주제로 강연하며 자신이 사는 집 ‘가제보’를 소개했다. 86년 요코하마에 직접 지어 지금도 살고 있다. 4층짜리 주상복합 건물로 1층은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이고, 2층은 회원제 공유 사무실과 도서관이다. 3~4층이 집이다. 1층 식당에서 900엔짜리 가정식 점심 메뉴를 판다. 아이들에게는 200엔만 받는다. 밤에는 술집으로 운영한다. “3~4층 집도 일부 공간을 개방해 사람들이 쓸 수 있게 할까 생각 중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결국 나이 든 내가 도움받게 되겠지. 이런 게 상부상조, 사는 재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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